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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_상처없는 철학, 철학없는 상처
문화비평_상처없는 철학, 철학없는 상처
  • 김영민 한일장신대
  • 승인 2004.05.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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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길은 걸음의 흔적이다. 그리고 痕迹은 말 그대로 발뒤꿈치의 상처, 헌데를 가리킨다. 사실 동서양을 무론하고 ‘길’은 철학적 탐색의 은유로 남용됐지만, 그 과정에서 상처의 이력이 한결같이 은폐된 사정은 몹시 기이하다. 길은 무엇보다 걷기의 지난한 흔적이되, ‘걷기’가 잊혀진 채 상속받거나 수입된 ‘길’(들)의 이치에 순치된 한국의 철학자들이 상처를 알 리 없으니 말이다.

인생의 8할이 바람(風)이라거나 대지(土)가 심성을 조형한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철학 이론 속에서는 바람의 흔적도, 흙의 자국도 깨끗이 지워지고 말았다. ‘걸음’이 없는 ‘길’들만이 종횡으로 엄숙하고, 또 한편 발랄할 뿐이다. 근대화, 도시화라는 것이 실은 흙과 바람을 체계적으로 제거한 포장과 건축의 공시화에 다름 아니었고, 우리의 현대 철학 역시 더 이상 ‘흙-바람(風土)’과 걷기를 말하지 않는 것으로써 스스로의 사이비 현대성을 완결지었기 때문이다.

‘길’에 못지않게 ‘집’ 역시 철학이 상습적으로 애용한 메타포인데, 기실 문명의 풍경이나 그 공간적 구조를 묘사하는데 ‘건축’만큼 효과적인 은유는 드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건축이 상처를 숨김으로써 스스로의 몸을 관념화, 심지어 식민화한다는 데 있다. 과연, 흙과 바람을 막고, 인간의 땀과 피의 이력을 숨기는 것이 건축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건축은 ‘추상화(ab-stractum)’의 본 뜻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것이다.

포우의 ‘모르그 街의 살인’을 보면, 살인이라는 사건은 그 건물의 현장에 의해 오히려 미궁 속에 빠지고, 그 건물이 은폐한 사건을 뒤팽이 복원시키는 것으로 이야기는 결말에 이른다. 가령, “그것은 용수철로 고정돼 있었는데, 경찰은 이것을 못으로 고정된 것으로 간주하고 더 이상의 수사를 포기했다”는 식으로, 마치 풍경의 端嚴이 기원의 곡절을 숨기듯이 건축이 사건을 은폐하는 것이다.

건축이 사건을 은폐하는 구조는 한국의 현대 철학과 인문학의 역사에 고스란히 적용된다. 요약하면, 수입일변도로 급조된 한국 현대철학의 건축술적 골격과 그 속성은 걷기의 상처를 체계적으로 은폐함으로써 가능해진 근엄하고 우스운 풍경에 다름 아닌 것이다. 풍토를 차단시킴으로써 가능해진 공간이 이미 터가 아니듯이, 상처가 사라짐으로써 비로소 나타나는 철학이라면 그 철학은 이미 사이비일 것.

그렇다고, 철거나 해체가 길과 건축이 은폐한 상처를 정당하게 대접하는 것도 아니다. 철거(de-construction)를 통해 건축(construction)의 독재와 일률에서 탈주하고 해방되는 이면에는, 오히려 건축의 생성사 속에 층층켜켜이 쌓여있는 상처와 주름이 영원히 사장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생성의 명랑’(니체)이 현대학문의 한 화두인 것은 틀림없지만,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생성의 상처’를 견결하게 따지고 섬세하게 헤아리는 재역사화인 것이다.

‘변명은 슬프다’의 시인 권경인은 길에 대한 일련의 시적 명상 속에서, “제 상처를 어루어 꿈이 되는 길”과 “온갖 길 다 섞으며 스스로 길에서 놓여나는 바람”을 말한다. 그러나 한국 현대 철학의 길은 흙과 바람, 걷기와 그 상처를 체계적으로 배제, 망각함으로써 가능해진 제국의 신작로와 같은 것이다. 물론, 상처만으로는 철학이 아니다; 그러나, 상처없는 철학 역시 우리의 철학은 아닌 것.

김영민 / 한일장신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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