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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언어의 아포리즘, 존재의 집을 찾아나서다
빛-언어의 아포리즘, 존재의 집을 찾아나서다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05.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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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사진에세이의 세계

▲“여러 소년들의 동작은 한결같이 춤을 닮아가고 있다.… 작은 공을 찰 때의 몸 동작은 큰 공을 찰 때보다 더욱 빠르고 정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이 아이들의 몸동작은 더욱 발랄한 춤에 가까워질 것이다.”-‘공차는 아이들’ 본문 중에서. ©

사진에 적절한 아포리즘을 곁들여 출판하는 ‘사진에세이’가 교양출판물의 한 장르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보통 글의 중간중간 사진들이 휴양도시처럼 박혀있는 모습을 보여주던 기존의 사진산문집과는 달리 요즘 유행하는 사진에세이는 작품으로서의 사진과 예술로서의 글이 결합한 ‘장르적 특징’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어 전과 다르다.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에 글을 붙인 ‘뒷모습’(현대문학 刊)이 대표적이라 할 만하다. 인간의 뒷모습만 집요하게 추적한 사진과 ‘뒷모습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투르니에의 독특한 관찰이 어우러진 책이다. 에세이스트 김훈이 포토 저널리스트 그룹 ‘매그넘’의 사진에 글을 붙인 ‘공차는 아이들’(생각의나무 刊)은 이에 비견할 만하다.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매그넘의 사진에서 놀이하는 인간은 즐거워보이지 않지만, 김훈의 글은 깡마르게 정지한 화면에서 공과 교감하는 인간의 생명력을 읽어낸다.

빛과 텍스트 속에 공명하는 단색조의 감정들

박완서, 이호철, 안도현, 공선옥 등 국내 소설가 29명이 각각 한장씩 뽑은 추억의 사진·글 모음인 ‘이 한 장의 사진’(샘터 刊)은 한 사람의 내면을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던 사진이라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그것은 개인의 가장 은밀한 기록이며, 개인이 과거를 기억하는 태도와 방식, 그의 현재를 있게 한 과거의 한 계기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매혹적이다. 작가들의 추억의 결은 끔찍함과 따사로움 사이를 폭넓게 오간다.

소설가 신경숙과 사진가 구본창이 함께 작업한 ‘자거라, 네 슬픔아’(현대문학 刊)도 촉촉한 감성이 유독 돋보인다. 신경숙은 어머니, 비, 보리밭, 담배, 책상 등에 관한 직관과 추억을 글로 풀었고, 구본창은 정류장, 철로, 밥상, 모자, 이부자리 등을 앵글로 포착한 뒤 짤막한 아포리즘을 달았다. 둘은 전혀 따로 놀고 있지만 일상의 이 발견에 깃들인 슬픔과 같은 단색조의 감정은 서로 스며들면서 공명한다.

출판장르로서 주목할 때 이 사진에세이들은 기본적으로 퓨전을 지향한다. 사진과 글의 우열이 없다.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면서 사진과 글은 각자의 말을, 또 공통된 언어를 개발해낸다. 사진에 관한 글은 비평이 아니고, 사진은 글에 대해서 멀리 떨어지려고 하고 있다. 이 책들은 우리의 에세이 풍토에 새로운 경향을 추가하는 역할을 하는 듯하다.

‘삶의 진솔미’를 바탕에 둔 에세이의 미학에는 그간 과도한 일상적 매너리즘이 끼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때로 주변의 시시콜콜한 풍속과 복고를 값싸게 내다파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사진은 이런 에세이에 ‘명상적 태도’ 내지는 ‘본질에 대한 탐구정신’을 껴안고 대중에게로 귀환하고 있다. 사진으로 포착된 대상들은 김훈의 말에 따르면 ‘흔적적’이다. 거기엔 존재의 흔적이 가득하다. 그 흔적 앞에서 글쓰는 이는 무한한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진이 그렇듯 그것은 글을 피해 달아나려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글은 애초에 사진의 세계를 포용하려는 수사적 노력을 포기하고, 그 침묵의 세계에 내려앉으려는 소극적인 전략을 채택한다. 그 소극성이 탄생시킨 언어는 ‘인상’을 왜곡없이 재현하려는 데서 오는 ‘자의식’과 함께 단말마의 신음처럼 묵직히 존재의 문제로 스며든다.

자기갱신의 미적 탐색 없으면 생명력 짧아

사진에세이집들이란 문자출판이 영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사진예술’이 소비되는 방식으로도 존재한다는 점을 눈여겨 필요가 있다. 그동안 사진은 전시회나 값비싼 양장본으로 소량 유통돼왔다. 그 결과 사진은 어느 정도 소외됐다. 하지만 에세이라는 ‘꿀’을 바르고 ‘예술’이라는 무거운 외투를 벗어던지니 폭넓게 대중의 품을 파고들게 됐다. 그것도 예술로서!

그렇다면 왜 우리시대는 사진이라는 ‘물건’을 꽤 옆에 두고 싶어하는 것일까. 보드리야르는 사진이 “침묵으로 소음에 저항하고, 부동자세로 가속에 저항하고, 비밀을 통해 정보의 분출에 저항함으로써 인간을 기술적인 금욕상태”에 직면하게 한다고 말했다. 확실히 이 모든 사진들은 아날로그적이다. 그것은 항상 과거의 한 때에 발 뒤꿈치를 정지시키고 있다. 투르니에가 본 것처럼 그것은 ‘뒷모습’을 강조한다. 하지만 사진이 재현하는 과거는 뭔가로 충만하다. 쉽게 지나가지 않고 오래 머무는, 인간의 몸을 과거의 한때에 대한 ‘回憶’으로 탱탱히 부풀려 올린다.

사진산문집에 실린 에세이들 또한 사진을 닮아있다. 오늘날 문자들이 물 흐르듯 흘러가는 온갖 조작된 영상들과 닮아 있는 것과는 정반대로 그것들은 사진의 사각형보다 작게, 짧은 싯구처럼 존재의 집을 짓는다. 문자적 금욕상태에 돌입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금욕의 정신이 보여주는 ‘풍경의 세계’에도 언뜻 ‘풍속과 복고의 상업화’ 그림자가 스쳐가는 건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이 트렌드가 스스로 자신을 모색하고 있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리라.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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