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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종교의 행복한 동거
과학과 종교의 행복한 동거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05.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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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모임을 찾아서17 : '과학과 종교 연구회'

과학과 종교는 서로 잘 지낼 수 있을까. 진화와 창조 등으로 오래 다퉈온 두 영역이 말이다. 그런데 시대의 변화가 가장 견고하고도 고집센 현대의 두 공룡에게 자성적인 물음을 던지게 하고 있다.

가령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서 종교학자를 생각해보자. 그에게 세계는 신의 표상일 수 있을까. 인간과 사이보그, 현실과 가상공간 중 어느 것이 진짜인지 대답하기 힘들다. 과학자도 마찬가지다. 복제기술이나 정보과학이 과학의 위상을 한껏 높여놓았지만, 세계를 오랫동안 다스려온 종교의 생존전략과 지혜를 빌려야 할 상황이 발생한다. 과학과 종교의 동거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서구에서는 최근 둘의 상호공존을 적극 추구하는 학술 흐름이 생겨났고, '과학과 종교, 상생의 길을 가다'(존 호트 지음, 구자현 옮김, 들녘 刊)와 같은 단행본으로 속속 번역되고 있다. 국내도 과학과 종교를 교양과목으로 가르치고 있는 대학이 몇 군데 생겨났으며, 이런 문제의식을 지닌 학자들의 연구모임도 결성돼 꾸려지고 있다.

▲김흡영 교수 ©

▲신재식 교수 ©

▲이정모 교수 ©

 

 

 

 

그 중 대표적인 게 지난 2000년부터 4년간 모이고 있는 '과학과 종교 연구회'다.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화학), 이정모 성균관대 교수(인지심리), 신재식 호남신학대 교수(조직신학), 채수일 한신대 교수(선교신학), 김흡영 강남대 교수(조직신학), 김윤성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구원(종교학), 장대익 서울대 강사(생물철학) 등 10여명의 학자가 매월 한차례 대우빌딩 회의실에 모여 2시간 정도 모임을 갖고 있다.

이 모임의 기본성격은 독서와 토론이다. 국내에 번역출간 된 과학·종교 관련서 가운데 토론해볼 만한 문제작, 화제작들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이다. 지난해에는 진화론 관계서를 중심으로 읽었고, 올해에는 진화심리학, 인지과학으로 영역을 넓혀서 나아가고 있다. 간사를 맡고 있는 장대익 씨는 "모임에 대한 회원들의 만족도가 상당히 높아 앞으로 더욱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포럼으로 발전시켜볼 생각"이라고 말한다.

이 모임엔 '자유주의적 성향'의 학자들이 많다는 것도 특징이다. '근본주의'에 가까운 주장을 가지고 있으면 회원이 될 수 없는데 대화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종교학자들은 현대과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어서 모임에 참가한다. 그래서 모임에서 주로 읽는 책은 과학책이다. 과학자들은 과학지식이 갖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측면에 대해서 종교학자들에게 의견을 구한다. 특히 자연과학의 최근 성취들이 인문학 전반, 특히 종교나 철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논의를 한다.

2시간이면 토론하기에 좀 짧지 않느냐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모임은 '발제' 없이 바로 토론에 들어간다. 책만 '반드시' 읽어오면 되는데, 얘기를 하다보면 혼자서 책을 읽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왜곡과 오류를 막을 수 있고, 발제를 해야하는 부담이 없어 오히려 장점이라고 한다.

그리고 모든 회원들이 과학과 종교의 기본 관계에 대해서는 오리엔테이션이 돼 있는 상태라, 책에 대한 기본 궁금증들을 푼 후 '잡담'에 빠지지 않고 과학과 종교의 '관계성' 자체로 토론의 초점을 맞출 수 있다는 게 회원들의 만족도가 높은 이유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리 깊이 있는 토론이 이뤄졌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전문가와 비전문가 사이에서 응답식으로 대화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영역에 계속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영역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으로 의미를 찾고 확장해 나가려고 한다.

올해에는 '빈 서판'(스티븐 핀커 지음, 사이언스북스 刊), '메이팅 마인드'(제프리 밀러 지음, 소소 刊), '생각의 지도'(리처드 니스벳 지음, 김영사 刊) 등을 읽고 있지만, 점차적으로 분자물리학, 정보과학, 로봇공학 등으로 영역을 넓히려 한다. 그리고 서구에서 넘어온 기독교적 관점에만 머물지 않고 동양종교를 전공한 학자들을 끌어들여서 그야말로 '종교'라는 말에 걸맞은 대화주제들을 개발해 나가려 한다. 그래야 서구에서의 논의를 단순히 따라가지 않으면서도, '우리'만의 문제의식을 통해 주체성을 가꾸고, 장기적으로는 서구학자들과의 동등한 대화의 채널도 모색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1년에 3만원씩 회비를 걷고, 책은 각자가 사보고, 장소는 김용준 교수가 이사장으로 있는 한국학술협의회에서 제공하기 때문에 모임을 운영하는 데에는 큰 부담이 없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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