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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일간 러시아공사관으로의 도피, 아관파천
375일간 러시아공사관으로의 도피, 아관파천
  • 교수신문
  • 승인 2020.12.24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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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아관파천 | 김영수 지음 | 역사공간 | 304쪽

정국 장악을 위한 고종의 정치적 선택
375일간 러시아공사관으로의 도피, 아관파천

1894년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요동치는 시기였다. 7월 23일 새벽, 일본은 용산에 있던 천여 명의 군대 병력을 경복궁으로 진군시켰다. 이렇게 경복궁을 강제 점령한 일본은 조선 정부를 붕괴시키고 친일정권을 탄생시켰다. 이틀 뒤인 25일, 일본 함대가 조선으로 청의 증원부대를 수송하던 영국상선을 격침하고, 이를 호위하던 청 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선전포고도 없이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8월 1일 일본은 청이 조선을 속방으로 칭하며 조선 내정에 간섭했다고 지적하고 선전포고했다.

청일전쟁은 조선을 둘러싼 청과 일본의 단순한 전쟁으로 끝나지 않았다. 전쟁 이후 동북아 국제질서는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구도로 급격히 재편되었다. 전쟁의 결과 1895년에 4월 17일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되자 러시아 재무대신 비테는 만주를 지키기 위해서 일본이 요동반도를 청에 반환하도록 독일과 프랑스에게 삼국간섭을 제안했다. 이후 러시아의 제안을 수용한 독일과 프랑스는 그 달 23일 일본의 요동반도 점유를 반대하는 성명을 일본에 전달했다. 일본은 삼국의 연합군과 싸울 수 없다고 판단했고, 결국 5월 5일에 삼국의 요구에 굴복했다. 

그해 10월 8일 새벽,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가 지휘하는 일본 군인과 자객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왕후를 암살한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시해도 모자라 왕후 폐위까지 공식 발표되자 단발령과 맞물려 전국에서 의병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당시 조선인은 을미사변을 임진왜란과 대등하게 인식할 정도였고, ‘삼강오륜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서 의병이 되었다. 

을미사변이 촉발하고 단발령이 퍼트린 반일정서는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이어졌다. 아관파천은 1896년 2월 11일 새벽 을미사변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이다. 조선에 체류하던 구미 외국인들의 반일감정도 악화되었다. 김홍집 내각을 등에 업고 일본이 각종 이권을 독식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반일정서를 바탕으로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조선의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에 이어한 아관파천은 조선정치사에서 대단히 불행한 사건이었다. 그것도 한 나라의 국왕이 여장을 한 채 피신했다니……. 그런데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아관파천을 부정적으로만 파악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 지식인들은 조선이 독립할 수 있는 기회라고도 생각했다. 이 책은 아관파천 시기를 살았던 다양한 인물들이 주인공이다. 아관파천의 주역이었던 고종, 아관파천을 주도하거나 관망한 사람들, 그리고 당대를 살았던 민초들의 다양한 시선을 따라 아관파천 375일을 재구성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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