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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적으로 혼탁한 정세, 숙의민주주의가 필요할 때로 보여......
국내외적으로 혼탁한 정세, 숙의민주주의가 필요할 때로 보여......
  • 교수신문
  • 승인 2020.12.24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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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의민주주의 | James S. Fishkin 지음 | 박정원 옮김 | 한국문화사 | 368쪽

한때 자유민주주의가 시대정신으로 찬양받던 시기가 있었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붕괴되고 소련형 사회주의체제가 몰락하던 시기에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 바 있다. 헤겔적 의미에서 자유민주주의가 다른 이념들에 대해 최종적 승리를 거두었다는 찬가에 다름 아니었다.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도 비슷한 시기에 ‘제3의 민주주의 물결(Third Wave)’을 논하면서, 세계적 차원의 민주화 물결을 인정하였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오늘날, 민주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위협받고 있다. 우선 2010년대 이후 포퓰리즘(populism)의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증대하고 있다. 과거 포퓰리즘이 발견되었던 지역에서 재현되고 있을 뿐 아니라 포퓰리즘과 거리가 멀었던 지역에서조차 그 부정적 측면이 표출되고 있는 중이다. 또한 헌팅턴이 생존했더라면 ‘제4의 민주주의 물결’로 간주했을지도 모르는 ‘아랍의 봄(Arab Spring)’은, 오늘날 그의 용어로 하자면 도도한 ‘역물결(reverse wave)’에 직면하고 있다.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짧은 기간 우리의 기대를 부풀게 했던 아랍의 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장춘몽이 되고 있고, 중동지역에서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는 독재체제는 이 지역에서의 민주화를 요원한 꿈으로 만들고 있다. 

이 가운데 특히 포퓰리즘의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은 심각한 것으로 보이는 바, 중·동유럽에서는 새로운 권위주의 또는 독재의 양상이 전개되고 있는 중이다. 러시아의 푸틴(Vladimir Putin)은 20년 이상 장기집권하면서, 자신의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인을 암살하거나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등 과거의 권위주의에 못지않은 억압정치로 복귀하여 러시아의 경우 형식적인 민주주의 외양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정체로 간주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중유럽의 구 공산 국가 가운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로의 체제전환(system transformation)에서 모범국가로 간주되어 온 헝가리에서는 오르반(Viktor Orbán) 수상이 2010년 이후 언론탄압을 노골화하면서 반대세력을 억압하고, 난민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국경선에 장벽을 설치하는 등 포퓰리즘 정치를 대변하고 있다. 언론자유나 시민권 침해와 관련하여 헝가리는 유럽연합 본부와 여러 차례에 걸쳐 충돌한 바 있다. 터키의 에르도간(Recep Erdogan) 대통령도 반대세력의 제거와 폭압정치에 있어서 푸틴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오르반은 스스로를 ‘비자유적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의 대변자로 자처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비자유적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한 다수결 결정이라는 민주주의 요소는 충족시키지만, 언론의 자유나 시민의 기본권과 같은 자유주의적 가치는 무시되는 정치체제이다. 

구 소비에트블럭(Soviet bloc)의 국가들이나 터키의 경우와 비교할 경우 비교적 비민주적 정도가 덜하기는 하지만, 민주주의의 선진지역으로 간주되는 서유럽과 북미 지역에서도 포퓰리즘 현상이 발견되고 있다. 영국에서의 브렉시트(Brexit) 통과나 프랑스 정치에서 민족전선의 활약, 이탈리아에서의 북부동맹과 오스트리아에서 자유당의 영향력 증대 등은 서유럽에서의 네오포퓰리즘을 대표하고 있으며, 서유럽 다른 국가들에서도 극우적 포퓰리즘 세력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는 중이다. 미국에서도 포퓰리즘의 영향은 예외가 아니어서, 2016년 대통령선거에서 러스트벨트의 불만을 포퓰리즘적 공약으로 대변한 것으로 알려진 트럼프는 대통령 당선 이후 미국우선주의를 내세우며 협력적 국제관계보다 대립적 외교행태를 보이고 있고,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건설하는 등 반 이민 정책을 전개하고 있다. 또한 비판적 언론에 대해 비우호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이처럼 21세기에 들어 포퓰리즘의 영향이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은 동시에 민주주의의 후퇴 내지 퇴행을 의미한다. 정치에 대한 이분법적 접근과 우적(友敵)의 구분, 언론자유의 억압과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 국수주의와 증오의 정치 조장, 소수자나 소수민족의 배제 및 제노포비아 등은 민주주의에 대한 포퓰리즘의 위협을 잘 보여주는 측면이라고 하겠다. 네덜란드 출신의 정치학자 카스 무데(Cas Mudde)가 자신의 논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우리가 사는 세계는 “포퓰리즘의 시대정신(Populist Zeitgeist)이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쿠야마의 야심적 선언 이후 겨우 한 세대도 지나기 전에 자유민주주의는 흔들리고 있고 다양한 도전들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관련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2020년에 본격적으로 확산된 코로나바이러스(Covid-19) 사태를 들 수 있다. 전염병의 예방과 확산방지를 위해 개인정보를 수집하거나 개인의 사생활 및 동선이 정부에 노출되는 등 시민의 권리에 대한 침해가 발생할 수 있다. 행정부의 권한이 과도하게 커지고 국민의 대표자인 의원들의 역할은 축소되는 ‘행정부 일방주의’가 논해지기도 한다. 정부의 시민에 대한 획일적 통제와 감시는 오웰(George Orwell)의 ‘1984’에서와 같은 이른바 ‘빅브라더’를 출현케 하여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훼손할 위험을 내포한다. 또한 코로나로 인한 신뢰 하락과 갈등의 확산이 사회적 자본을 위축시킴으로써 민주주의를 약화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더하여, 코로나로 인해 민족주의가 강화되고 배타적인 자국중심주의가 득세하면서 국제사회에서의 협력과 다자주의적 흐름은 배척되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국제정세는 각국에 자민족중심주의나 일국주의를 강화함으로써 대내적으로도 비판적 목소리를 억압하거나 시민의 기본권을 무시하는 등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 되고 있다. 인류역사를 코로나 이전시대(before corona: BC)와 코로나 이후시대(after disease: AD)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과장된 면이 없진 않으나, 그만큼 코로나가 앞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서 큰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는 지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오늘날 민주주의 퇴행과 후퇴의 시기를 맞아 새롭게 민주주의를 부활시키고 재활성화시켜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참여민주주의, 숙의민주주의, 공화주의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새롭게 부각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민주주의의 세계적 위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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