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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의 굴레에 갇혀있던 '기'의 복원…활氣찬 창조성 주목돼
관념의 굴레에 갇혀있던 '기'의 복원…활氣찬 창조성 주목돼
  • 전호근 성균관대
  • 승인 2004.05.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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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기학의 모험 1』(김교빈 외 지음, 들녘 刊, 2004, 284쪽)

전호근 / 성균관대·유교철학

처음 책을 전해받은 순간 '기학의 모험1'이란 작은 제목이 크게 와 닿는다. 잠시 생각에 잠긴다.

모험이라…. 도대체 학문의 영역에서 모험이란 도발적인 말이 이리 쉽게 사용될 수 있는 것인가. 더욱이 우리 사회에서 학문이란 본래 모험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던가. 세로로 써 내려간 부제는 더욱 위험해 보인다. '동서양 철학자, 유배된 기의 부활을 말하다'.

동서양 철학자라니? 언제부터 철학에 동서가 있었던가 하는 부차적인 의문은 차치하고 과연 누가 동서양 철학자란 말인가. 우리 사회에 학문수입상이나 골동품상 말고 정말 철학자가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유배된 기의 부활을 말하겠다니, 그럼 지금까지의 기에 관한 숱한 연구가 모두 잘못됐단 말인가. 부정적인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됐지만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는 이 모든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天理'는 알고 '人事'는 몰랐던 철학자들

전통철학의 범주 중에서 '氣'라는 용어만큼 많은 함축을 담고 있는 개념도 드물다.
우주만물의 생멸을 설명하는 거대범주에서부터 浩然之氣, 義氣 등을 비롯한 인간내면의 도덕적 성향과 생기, 혈기, 광기 등을 비롯한 육체적 생리현상은 물론이고 심지어 접미사로 쓰이는 雰圍氣의 기나 흔히 '끼'라고 불리는 모종의 문화적 성질에 이르기까지 기라는 범주가 담고 있는 함의는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기의 이러한 측면을 인정하면서도 막상 철학사를 논의할 때는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친절한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理氣의 기는 설명하면서도 저 숱한 사람들의 '끼'를 설명하지 못한다면야 '천리는 잘 아는데 인사를 알지 못한다'는 오래된 비판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책을 엮어낸 네 명의 저자들은 이상에서 말한 범주 거의 모두를 언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강좌에 참여했던 지식대중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시대의 기를 적극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첫 번째 저자 김교빈은 '역사 속의 기를 찾아서'라는 제목 아래에 중국고대 기학의 탄생에서부터 음양오행론과 한의학을 거쳐 이기론이라는 거대담론의 핵심개념으로 자리잡게 된 기의 역정을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어 이를 '작은 기학사'라고 이름을 붙여도 손색이 없다. 특히 최종적으로 조선조의 화담 서경덕과 율곡 이이의 기학을 정리하면서 기 개념을 통해 사회적 실천과 개혁의 논리를 이끌어내고 있는 점은 우리의 철학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중요한 시사를 준다.

두 번째 저자 이정우는 비교담론학의 공간 속에 기를 던져놓고 서구의 자연철학, 형이상학, 존재론에 나타난 퓌지스와 프쉬케, 형상과 질료 등의 범주와 기를 상호 비교하면서 동서양 기학의 커다란 지도를 그려내고 있다. 저자 스스로 범주적 폭력성이나 단순화의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 구체적인 논증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시도가 왕왕 일부 개념의 유사성을 근거로 이상한 결론을 내놓는 우를 범한 것과는 크게 다르다. 이 글은 새로운 공간 속에서 기학의 전개를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학의 가능성을 넓혀준다.

세 번째 저자 김시천은 '마음 이론에서 과학 이론으로'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서 우리의 철학사를 새롭게 조망할 수 있는 길을 터놓고 있다. 그는 조선조 후기의 홍대용이나 최한기의 기학은 기존의 기론이 理는 性으로 情은 氣로 분류하면서 氣를 理의 하위개념으로 놓는 심성론적 계열화였다면 이들의 담론은 철저하게 물론적 계열화 곧 氣-形-物-名으로 이어지는 기의 독자성을 획득하는 방향으로 형성됐다는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고 이를 '도덕 형이상학에서 과학으로의 담론의 전환'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마지막 저자인 이현구는 '기와 근대과학의 만남'이라는 글에서 조선조 후기의 기학자 최한기가 전통철학의 계승자이면서도 서구과학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수천년의 동양학문과 서양의 근대적 과학지식을 융합해 새로운 체계를 세웠다고 정리하고 있다. 이 글은 지금의 우리 또한 최한기와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기학의 지평을 넓힐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희망적이다.

물론 인용원문의 해석이나 기의 동일성을 설명하는 데에서 오류로 보이는 부분이나 견해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이 책이 던지는 논의의 창조성에 비하면 하찮은 것들이며 좀더 많은 지면에 논의를 양보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일찍이 다산은 주희가 정이천의 견해를 받아들여 '대학'의 '身有所忿 '의 '身'을 '心'으로 바꾼 것을 두고 "身과 心을 이원화시킴으로써 유학에서 말하는 '修身'의 절실한 의미를 훼손했다"라고 비판하고, 이것을 다시 '身'으로 복원해냈다. 관념의 굴레에 갇혀 있던 기의 복원을 시도하는 이들에게서 나는 '心'에 갇혀 있던 '身'을 되살려 낸 다산의 정신이 부활하는 상상을 해본다.

중국고대 기학의 탄생에서부터 화담과 율곡을 거쳐 오늘날의 관심까지 포괄하고 있는 김교빈의 학문적 온축, 비교담론학의 입장에서 기와 퓌지스를 비교하면서 현대기학으로 가는 길을 모색하는 이정우의 날카로운 눈, 심성론으로 대표되는 도덕형이상학을 넘어 物論으로의 전환을 시도하면서 조선후기사상사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는 김시천의 역동적 논의, 최한기의 기학을 통해 새로운 기학을 꿈꾸는 이현구의 학문적 열정. 이 모든 것이 나에게 그런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나는 이 활氣찬 논의에서 왜 빠졌을까.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16세기 조선성리학의 특징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 '유가철학 원전 번역을 통해 본 우리의 근대', '溫故知新과 述而不作의 사이에서-論語飜譯本에 대한 檢討', '徐敬德의 氣一元論的 世界觀에 대한 一考察'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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