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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에크 시대에 등장한 '뮈르달'적 사유
하이에크 시대에 등장한 '뮈르달'적 사유
  • 배진영 인제대
  • 승인 2004.05.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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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서평_『사다리 걷어차기』| 장하준 지음| 형성백 옮김| 부키 刊| 2004| 327 쪽

▲ © libro
장하준 교수의 ‘사다리 걷어차기’는 2세기 전 독일 역사학파의 리스트가 다시 우리 곁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책 전체에 흐르는 그의 정신과 내용 전개 및 분석 방법 그리고 개발연대에 살아 온 한국인이라는 저자의 시대적 배경 등은 리스트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의 책 제목 역시 리스트의 ‘국민경제체계’의 내용 중에서 따온 글귀이다. ‘사다리 걷어차기’란 사다리를 타고 정상에 먼저 올라간 자가 뒤 이어 올라오려고 하는 다른 이들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그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교활한 전략’을 말한다. 

책은 서장에 이어 3부로 구성돼 있다. 저자는 제도와 정책을 항구성과 가변성으로 구분하고, 1부를 정책 측면에서 그리고 2부를 제도 측면에서 선진국의 경제발전 과정을 분석하고 있다. 1부와 2부는 선진국이 개도국과 후진국들에게 그들의 정책과 제도를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논증하고 있다. 이를 위해 책은 현재의 선진국들 역시 그들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지금의 개도국보다 더 강력한 보호무역과 유치산업을 위한 각종 산업정책이 광범하게 실시됐음을 여러 사례와 통계자료를 통해 보여준다.

▲ © 일러스트 김차준
특히 책은 미국의 발전 역사를 비교적 자세히 다룸으로써 최근 미국 주도로 이뤄지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신랄하고 냉소적으로 비판한다. 3부는 1부와 2부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어떤 국가도 신자유주의의 논리와 강요를 아무런 생각과 저항 없이 수용하지 말아야 함을 강력히 주문하고 있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도 하나의 사조에 불과할 뿐 만병통치약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국가들은 자국의 경제발전 단계와 주어진 환경에 능동적이고 유연하게 대응해야 하며 이를 위해 정책과 제도의 섬세한 조율이 반드시 필요함을 역설하면서 책은 마무리 하고 있다.

연구 방법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 있어서 시대의 주류를 거부하는 저자의 용기는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책은 오늘날 주류 경제학인 신고전학파의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연역적인 접근법을 거부하고, 전적으로 사례연구를 통해 저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귀납적 추론은 모델과 수학 기법의 압축적 논리 전개를 위해 어쩔 수 없는 가정의 비현실성과 난해함을 극복하면서, 현재와 과거의 풍부한 증거 제시로서 우리에게 지식과 사고의 폭을 넓혀주고 인식 능력을 높여준다. 이 결과 책은 학자나 전문가들만의 전유물로 여겨져 온 ‘자유 대 보호’의 오랜 논쟁을 일반 대중까지 그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어떤 국가에도 적용되는 하나의 시스템과 이념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은 저자가 이분법의 이념적 사고가 아니라 구성주의의 실용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구성주의적 사고 바탕 위에서 오늘날 거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최선의 길인지를 되돌아보게 하고 지금의 세계와는 또 다른 아니 더 나은 세계가 있을 수도 있음을 함축한다. 사실, 저자의 단계별 경제성장 전략은 일본과 한국을 위시한 동아시아 국가의 경제발전 모델을 통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를 현재의 선진국들까지 확장했다는 것은 매우 돋보이게 하면서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의미 있고 흥미로운 연구결과다.     

 
그러나 저자의 귀납적 연구방법과 구성주의적 세계관은 그 자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논쟁거리와 의문을 갖게 한다. 먼저 저자는 비록 많은 사례와 선행 연구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들 자료만으로 각국의 무역 및 산업정책의 시대별 특징을 쉽게 단정할 수 있을까 하는 ‘귀납적 추론의 확정 불가능성’과 ‘주관적 가치판단의 게재 가능성’ 문제를 자유주의자들에게 던지고 있다. 이것은 리스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귀납적 단정과 관련해 또 다른 지적은 경제발전과 정책 및 제도의 인과관계에 관한 심도 있는 분석 없이 단지 1인당 GNP의 추이만으로 이들의 경제효과를 평가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유치산업의 육성은 보호무역을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도 어느 정도 수긍하고 인정하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유치산업은 경제발전에 있어 장기적이고 구조적이며 동태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유치산업의 이러한 성격은 또한 유치산업의 경제적 효과 분석이 단순하고 평면적으로 진행돼서는 안 됨을 말해주기도 한다.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은 뮈르달과 하이에크에게 공동으로 주어졌다. 노벨 재단은 ‘자유 대 간여’에 있어서 너무도 대조적인 이 두 경제학자에게 상을 공동 수여했다. 당시의 시대적 주류는 뮈르달이었으며 하이에크는 비주류에 속했다. 그러나 오늘날 시대의 흐름은 하이에크 편에 있다. 그리고 저자는 2003년 뮈르달 상을 수상하였다. 뮈르달은 선진국에 적합한 경제이론이나 논리를 후진국에도 그대로 적용할 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며 제도와 정책은 각국의 발전 단계와 주어진 여건에 적합하도록 다듬어져야 함을 역설했다. 이것은 거의 모든 경제발전론자들이 인정하는 바다. 반면에 하이에크는 자유와 경쟁에서 기대될 수 있는 지식의 확대와 이로 인한 경제의 역동성, 그리고 정부의 섬세한 정책 조율 능력에 대한 깊은 회의와 부패 가능성을 설파했다. 하이에크의 논지 역시 시대가 입증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혹시 우리에게 오도된 여론을 형성하고 위험한 정책 시사점을 제공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게 한다. 왜냐하면 경제가 발전하고 그 규모가 확대될수록, 그리고 산업의 성쇠 속도가 빨라질수록 뮈르달보다 하이에크의 논지가 더욱 설득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뮈르달적인 저자의 사고가 현재의 우리 경제에 적합한지 아니면 하이에크의 요구가 우리의 시대정신인지를 현명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식들을 키울 때 제기되는 고민과 별 다름이 없다.

이들 몇몇 지적이 이 책의 가치를 저하시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편견을 시정하고 시대의 조류가 반드시 옳은 것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역저임에 틀림이 없다.

배진영 / 인제대 경제학

필자는 독일의 알버트 루드윅 대에서 ‘세계시장이 형성된 발전국가에서의 수입대체: 한국적 사례의 이론적 분석과 경험적 결과를 중심으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남북경제통합의 통일비용과 전략’, ‘한국 경제론’, ‘경제질서의 이론과 정책’, ‘독일통일과 한반도 통일전략’, ‘사회적 시장경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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