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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영화가 만난 역사
문화비평: 영화가 만난 역사
  • 김용희 평택대
  • 승인 2004.05.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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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에 이어 ‘태극기를 휘날리며’가 영화관객 1천만 돌파라는 한국영화시장의 놀라운 판도를 만들어냈다. 사실 관객이 영화를 보러가는 것은 일상의 지겨움에 대해 자기 자신을 초월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현실을 넘어서는 것, 영화는 어떤 절대적인 것에 대한 추구와 관계한다. 한국영화관객 1천만 돌파는 어떤 점에서 한국의 일상이 그마만큼 지리멸렬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반증이다. 억압되고 피곤한 현실 속에서 환상을 꿈꿀 수 있는 공간은 영화관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원시시대 사라진 일종의 현대판 제의의 장소다. 사람들은 영화관에 가서 그들의 잃어버린 꿈을 발견하고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것에 대한 발견을 시도한다. 동시에 문명사회가 만들어낸 죄의식, 즉 누군가를 억압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죄를 고해성사 한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자기 자신들의 억압에서 풀려나기를 원한다. 영화관의 검은 휘장은 지성소로 들어가는 그 휘장인 셈이다.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거대담론,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거대한 것에 관여함으로써 비로소 자기존재를 넘어서는 어떤 지대를 발견하려 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와 삶을 뛰어넘게 할 어떤 것, 절대적인 어떤 것에 동참하기를 원한다. 숭고에 대한 추구라 할 수 있다. 1990년대 일상사와 멜로만으로 존재를 넘어서는 숭고를 느낄 수 없다.

영화 ‘실미도’는 그런 점에서 ‘부정적 숭고’라 할 수 있다. ‘실미도’ 현상은 진지함과 비장함으로 국가에 대한 정면 도전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한국민에게 풍문으로만 떠돌던 기이한 소문이 진실이었다는 확인. 영화는 국가이데올로기의 억압의 요소, 지배 권력자가 만들어놓은 오독된 역사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역사기록자로서 기능하고 있다. 민족 분단과 분단의 지속 속에서 이데올로기에 철저하게 희생된 자들에 대한 관심, 억압된 역사를 들춰내 이제는 발언할 수 있다는 사실은 한국 민주주의가 그것을 수용할 만큼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에서의 1천만 돌파는 또 다른 의미를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한국민에게 오랫동안 억압돼왔던 강박증, 즉 민족과 이데올로기의 문제, 레드콤플렉스. 분단과 민족의 문제는 아직도 여전히 문제적이다. 흔히 1980년대 이념의 시대를 넘어 1990년대는 1980년대의 거대담론, 즉 이데올로기 담론이 무너진 일상성, 미시담론의 시대라고 말한다. 1990년대는 후기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진행됐고 세계화를 운운하며 세계경쟁력을 위해 매진하던 때였다. 1990년대 거대담론이 무너지자 이념은 희화화돼 나타나기도 했다. 이를테면 영화 ‘간첩 리철진’이나 ‘동해물과 백두산이’ 등에서 남북의 문제는 형제애적인 면을 희화해 연출한다.

그러나 2천 년대 우리가 맞게 된 것은 경제의 종속화가 심화돼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다. 한국은 경제면에서든 정치면에서든 열패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1990년대 일상의 서사를 넘어 새로운 세기, 우리는 이념의 문제로 다시 귀환한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일본의 독도영토분쟁. 왜곡된 과거사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은 지금, 이곳에서의 한국민의 정체성과 미래적 비전을 전망하고자 함이다. ‘실미도’의 강인찬은 죽었지만 영화는 살아 역사를 말하고 있다.   

다만 다시 도래한 이념의 문제, 민족의 문제가 한국민이 가지는 집단적 민족주의와 편승해서는 안된다. IMF시절 금모으기 운동과 8?15 콜라의 상업화를 생각해본다면 한국민족이 갖는 집단적 민족주의를 짐작할 수 있다. 이를테면 어머니에 대한 생각, 가족에 대한 그리움, 민족에 대한 열정은 유교적 가족주의, 민족주의와 연결되는 부분이다. 문제는 국가나 문화사업이 민족주의를 정략적으로 수단화할 경우 거대한 파시즘의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다. 나치즘 시대 나찌는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해 영화를 수단화했다.

어찌됐든 영화는 역사를 만나고 있다. ‘실미도’와 ‘태극기를 휘날리며’는 민족의 문제를 다시금 제기하면서 일상을 벗고 숭고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시금 질문한다.

김용희 / 평택대 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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