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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타비'한 시대… '후안무치'한 정치∙'천학지어'한 시민들
'아시타비'한 시대… '후안무치'한 정치∙'천학지어'한 시민들
  • 박강수
  • 승인 2020.12.20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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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를 통해 본 2020년
그림=김상돈 경민대 교수
그림=김상돈 경민대 교수

 

A.C(After Corona) 원년이 저물어 간다. 올해 경합한 사자성어는 총 6개로 전체 1천812표 중 아시타비가 588표(32.4%)를 얻어 2020년의 사자성어가 됐다. 이어서 후안무치 396표(21.8%), 격화소양 304표(16.7%), 첩첩산중 231표(12.7%), 천학지어 148표(8.1%), 중구삭금 145표(8%) 순이다. 교수사회의 선택은 크게 분열의 덫에 걸린 정치권에 대한 책망과 코로나19바이러스 창궐 이후 난맥상에 대한 토로로 갈렸다. 무게중심은 전자에 쏠렸다. 1위 아시타비와 2위 후안무치를 합치면 과반을 넘는다(54.3%).


아시타비(我是他非)와 후안무치(厚颜無耻)는 ‘뻔뻔한 정치적 태도’라는 테마로 묶인다. 부끄러움을 잊은 정치가 남 탓하기 시비 다툼에 세상을 가둬버렸다는 비판이다. 다수 응답자가 그 사례로 검찰개혁을 둘러싼 ‘추∙윤 갈등’을 꼽았다. 지난 1월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취임한 이래 1년간 ‘검언유착 의혹’, ‘검사 접대 의혹’ 등이 터져 나왔고, 이어 두 차례 수사지휘권 발동과 헌정 사상 첫 검찰총장 징계(정직 2개월)가 있었다. 여권과 검찰 사이 갈등이 막바지로 치닫는 국면이다. 진영의 골이 깊어지면서 윤석열 검찰총장은 야권의 유력 대선후보로 급부상하기도 했다.


아울러 “가짜뉴스와 대안적 진실을 앞세운 확증편향(인문∙50대)”, “각자의 입장에 경도된 언론과 논객, 지식인의 왜곡된 정치의식(인문∙40대)” 등 공론장의 세태를 겨냥한 지적도 눈에 띄었다. 특히 아시타비와 후안무치를 함께 선정한 교수가 많았고 후안무치를 뽑은 쪽에서 집권 여당 외 야당, 검찰, 언론에 대한 비판이 두드러졌다는 점도 특기할 만 하다. 한 60대 인문대 교수는 아시타비를 “반정부 진영에서 정부를 보는 입장”으로 후안무치를 “집권 세력이 야권을 보는 입장”으로 요약했다. “아시타비는 후안무치를 동반한다(자연∙60대)”라는 문장은 두 사자성어의 관계를 갈무리했다.


정치가 진영에 갇힌 사이 좌초된 정책과 방기된 실패에 대한 답답함은 3위 격화소양(隔靴搔癢)에 투영됐다. 격화소양은 ‘신을 신은 채 가려운 부위를 긁는다’라는 뜻이다. 추천자인 김병기 전북대 교수(중문학과)는 “정부의 의지에는 공감하지만 피부로 느낄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어 답답하다”라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격화소양의 뜻에 공감한 교수들은 “촛불 대선과 총선 압승에도 오히려 약해진 집권 여당의 개혁의지(사회∙60대)”, “검찰 개혁, 부동산 정책 등 주요 의제에서 기득권층의 끈질긴 저항(사회∙60대)” 등을 개혁 지연의 원인으로 꼽았다.


4위 첩첩산중(疊疊山中)과 5위 천학지어(泉涸之魚)는 1년 내내 전세계를 지배한 팬데믹이라는 맥락에 초점을 맞춘 선택이다. 첩첩산중을 뽑은 교수들은 “마스크를 벗지 못하는 현재 상황과 맞아 떨어진다(인문∙40대)”, “코로나19 대유행에 조류독감, 돼지열병까지 겹치는 현실에 적합하다(예체능∙30대)” 등의 의견을 냈다. 천학지어를 뽑은 148명은 혹독한 세태 속에서도 희망을 보고자 했다. “한국 시민의 연대와 협력(인문∙40대)”, “감염의 위험을 무릅쓴 의사와 간호사, 소방대원의 살신성인 정신(인문∙60대)” 등이 희망의 근거로 제시됐다.


최종후보에는 들지 못했지만 절처봉생(絶處逢生) 역시 코로나19 상황의 핵심을 수습한 사자성어다. 절처봉생은 ‘몹시 쪼들리던 판에 요행히 살 길이 생겼다’라는 뜻으로 바둑 용어로도 쓰인다. 중국 원나라의 희극작가 관한경의 작품 『전대윤지감비의몽』에서 유래했다. 이를 추천한 이동철 용인대 교수(중국학과)는 “한국뿐 아닌 전 인류의 위기 상황에서 대학 온라인 교육 전환, 기본소득 논의, 자본주의와 생태주의에 대한 반성이 나오면서 살 길을 모색하고 있다”며 “새로운 문명,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담고자 했다”라고 설명했다.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이 추천한 불상유통(不相流通)도 최종후보에는 들지 못했으나 주목 할만 하다. 『세종실록』에 수록된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는다”라는 글귀에서 발췌한 성어로 ‘서로 소통되지 않는다’는 뜻을 갖는다. 박 소장은 “남북관계와 검찰개혁, 코로나19 등에서 정부와 국민 사이, 정부 부처 사이, 국민 사이 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라며 “2020년은 불통의 한 해”라고 진단했다. 진영 갈등과 사회적 거리두기로 단절이 전면화되고 일상화된 한 시절을 함축한 성어다.


박강수 기자 pp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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