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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동향 : 자연과학의 인문학적 버전들
출판동향 : 자연과학의 인문학적 버전들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05.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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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옷 입고 등장한 과학서들의 생동감

▲ © yes24
요즘 들어 과학의 인문학적 버전들을 빈번하게 만날 수 있다. 과학적 내용이 인문학의 틀에 담겨서 제시된다는 뜻이다. 외국에선 과학저술가(science writer)들이 두텁게 형성돼 어려운 과학을 쉽고 매혹적인 에세이로 전달하거나, BBC처럼 텔레비전 과학프로그램을 책으로 연계시키는 프로듀서 개념에서 만든 책들이 국내에 많이 번역되고 있다.

과학의 인문학적 표현은 다른 분야와의 만남을 통해 이뤄지기도 한다. 아서 밀러의 '천재성의 비밀'(사이언스북스 刊)은 '과학과 미술'을, '음악은 왜 우리를 사로잡는가'(로베르 주르뎅 지음, 궁리 刊)는 '과학과 음악'을 만나게 해 의미의 풍경을 만들어 낸다. '천재성의 비밀'에서 우리는 20세기 초 원자론이 거부되고 시각적 표상이 없는 원자물리학이 나타나자, 인간의 직관이 점점 추상적인 것이 돼 시각 이미지의 개념이 변하고, 이와 궤를 같이 해 예술 또한 후기 인상파에서 큐비즘을 거쳐, 현대 추상표현주의에 이르게 됐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저자는 피카소와 브라크, 뒤샹과 몬드리안의 예술 작품을 예로 들며 과학과 예술에서 이미지의 창조성이 얼마나 유사한 지를 짚어간다. '음악은 왜…'는 특정 소리의 진동이 인간의 뇌에 어떻게 여러 감흥을 불러일으키는지, 그 메커니즘에 대한 과학적 답변이다. 이 책들은 과학자의 눈으로 살핀 예술이라, 인문학에 익숙한 이들은 그 속에서 '생각의 역전현상'을 경험할 지도 모른다. 어차피 과학과 예술은 깊은 곳에서 서로 만나겠지만, 그 만남이 예술가에 의해 주선되느냐, 아니면 과학자에 의해 주선되느냐는 큰 차이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의 눈으로 보는 세계는 여전히 새롭다.

최근 들어서는 과학이 소설의 옷을 입고 등장하는 추세가 나타났다. 대표적인 것이 '소설로 읽는 진화생물학'이란 부제가 붙은 '마야'(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현암사 刊)다. 이 소설은 현대 진화생물학의 기본 개념을 골고루 소개하면서 날카로운 해석을 곁들인 책이다. 노르웨이 진화생물학자인 주인공 프랑크는 시간변경선이 지나는 피지 제도의 타베우니 섬에서 안나와 호세라는 커플을 신비로운 커플을 만나면서 삶에 대해 깊은 사색에 빠지게 된다. 안나라는 여자가 고야의 '벌거벗은 마야'와 얼굴이 똑같다는 데서 얽혀들기 시작한 수수께끼는 "인간을 창조하는 데는 수십억년이 걸렸다. 그러나 죽는 데는 겨우 몇 초가 걸릴 뿐이다" 등의 질문을 불러일으키며 진화와 학문의 한계에 대해서 성찰을 불러 일으킨다. '소피의 세계'라는 철학소설로 유명한 작가 요슈타인 가아더는 이 책에서도 마법적 분위기의 문체와 추리소설의 기법으로 우리 신체의 진화생물학적 진실을 보여주고 그것의 한계 또한 읽어준다. "인생이 이렇게 짧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든 극복할 수 있을까?"란 질문에서 보듯 작가는 존재의 보잘것없음을 뛰어넘는 방법론으로 상상력의 힘이 얼마나 유용한 것인지를 주인공들의 꼬리를 무는 대화를 통해서 알게 해준다.

▲ © yes24
'소립자'(미셸 우엘벡 지음, 열린책들 刊)는 과학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지만 과학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씌어진 소설이다. 공교롭게도 여기선 진화생물학의 건너편에 있는 '분자생물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주인공이다. 이 소설은 1998년 프랑스 '리르'지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됐는데, 당대의 주류적 시대정신과 지배적인 가치를 부정하고 조롱하며, 유전자 조작으로 남녀의 성구분을 없앤 새로운 인류를 탄생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담아 르 클레지오 같은 기성작가들에게 기피대상 1호로 떠오른 작품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과학지식은 주인공의 실험이 아인슈타인의 학설을 뒤집는다는 등 줄거리의 재료로 사용되고 있으나 "탄소와 산소와 질소가 하는 역할을 다른 것들이 맡게 될 수도 있었으리라. 게르마늄과 셀레늄과 비소가 될 수도 있었으리라" 등에서 보듯 시니컬한 세상인식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어머니의 애정을 받지 못한 배다른 형제 미셸과 브뤼노의 절망적 삶을 그렸는데, 분자생물학자이자 사색적이고 이상적인 성격의 미셸은 거의 성불구에 가까운 수도승적인 삶에서 절망을 느끼고, 동물적 욕망에 들끓는 인물로 그려지는 형 뷔르노는 여성의 육체를 끊임없이 갈구하지만 매일 실패를 거듭하는 인생이다. 포르노로 가득차고 뉴에이지 같은 천박한 철학으로 뒤덮인 당대를 조롱하는 작가의 음성에서 '과학'은 이런 삶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자, 동시에 세속적 삶을 향한 위협의 무기로 비쳐진다.

소설 속에 그려진 과학적 지식들은 우리가 움직이는 하나하나의 행동 및 세상의 구체적 모습 속에 용해된 과학을 구현하기 때문에 이론서로 만날 때보다 훨씬 생동감 넘친다. 따라서 과학을 '이야기'라는 언어에 실어내려는 우리 시대의 움직임은 앞에서 거론한 책들의 대중적 선호와 맞물려 앞으로 계속 그 흐름을 이어가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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