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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금지된 씨알의 소리'
다시 읽는 '금지된 씨알의 소리'
  • 김용준 교수
  • 승인 2004.05.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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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39

▲민청학련 사건의 재판 모습 © 민청학련계승사업회

'씨알의 소리'지 1974년 5월호에 '民主靑年學生聯盟 事件과 우리의 反省'이라는 함 선생님의 글의 제목이 표지 및 목차에는 나와 있는데 실질적으로는 전면 삭제되어 후에 '금지된 씨 의 소리'라는 별책에 수록되어 있다. 이 한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당시의 사정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 내용을 발췌해보면 다음과 같다.

<지난 4월 25일 중앙정보부장은 갑자기 '민주청년학생연맹사건'의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고, 이어서 29일에는 문화공보부에서 '민청학련의 정체'라는 작은 책자를 만들어 각 곳에 보내어 국민의 경각심을 촉구했다. 그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고등학생까지를 넣어서 학생들이 공산폭력단과 손을 잡고 폭력으로 정부를 거꾸러뜨릴 것을 계획했다는 것이다.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기탄없이 말해서 이날 것 그런 기관들에서 발표하는 사건들을 보면 매양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의 느낌이 없지 않았다. 빨갱이니 껌정이니 무슨 사건 무슨 사건해서 굉장히 흉악무도한 놈들이 무서운 일을 한 줄로 알고 공판장에 가서 방청을 해보면 검사의 심문과 수사 기관에서 만든 조서와 피고들의 답변과 변호사의 심문과 증인들의 증언을 종합해서 냉정한 이성으로 판단을 해보면 "아, 그런걸 가지구 그랬댔군"하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게 된다. 이번 사건도 또 그런지 아닌지는 있다 봐야 알겠지만 듣는 마음으로서는 우선 그런 의심을 아니할 수 없이 된 것이 해방 이후의 우리 사회의 상황이다….

그러나 그렇다손 치더라도 사람은 참에 산다. 공정을 찾아야 병신이나마 사람노릇을 하게 마련이다. 장마가 석 달을 계속해도 햇빛을 그리는 마음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그것이 같은 조상에서 나오면서도 하나는 두더지가 되고 하나는 인류가 된 까닭일 것이다. 눈이 있어 빛을 보는 것이 아니라 참을 찾는 마음이 빛을 불러냈다. 이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은 빛의 아들이다. 빛 없이 나라 못한다….

아무리 빗나감이 많고 억지·무리·조작이 많은 이 사회라 하더라도 고등학생까지 더구나 기독학생의 이름으로 끌려나와 무대 위에서 공산주의자와 역사적 씨름을 하는 우리에게는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구식적인 특권의식에서 벗어나서 역사의식을 좀 가지는 눈으로 한다면 4·19 이래의 모든 학생운동은 결코 경거망동이라, 본분을 잊고 하는 일이라 볼 수는 없다. 개개인 학생에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학생운동을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다룰 때는 그 역사적 필연성을 찾는 자리에서 할 것이지 그 일부분의 잘못을 들어 전체에 씌워서 운동 자체를 첨부터 부정하려는 것은 시대착오다. 우리가 보기에는 본분을 잊어서가 아니라 본분을 아는데서 나오는 일이다. 오늘 학생은 결코 옛날같이 인생의 준비과정에 있어 成年들을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 선거권을 가지고 있다….

이십여 년 동안에 우리 국민 사상에서 크게 잘못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4·19를 혼란이라고 부르는 일이 더러 들려오는 일이다. 4·19가 일어났을 때 감격해서 울지 않은 사람 누군가? 자유당의 사람은 몰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 그것을 하나의 역사적 새로남으로 알았고 낡은 악의 청산으로 축하하고 고맙게 알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떻게 감히 거기에다 혼란이란 말을 가져다 붙일까?…

4·19는 혁명이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정의와 자유의 승리였다.
그것을 누가 했나?
학생이 했다. 그 피를 거룩하게 부음으로 했다!
거품없는 물 없지만 거품이 제대로 시냇물을 더럽힐 수 없듯이 몇 사람의 망나니 학생이 절대로 학생 운동을 더럽힐 수 없다!
학생은 역사의 선봉대다!…

물이 흘러가는 대로 두면 물같이 순한 것 없고 그것같이 맑고 음악적인 것 없다. 그러나 그 가는 길을 한 번 정면에서 막으면 그것같이 맹렬하고 사납고 무서운 것 없다. 데모하는 학생을 보고 사납다고 하는 것은 시냇물의 길을 제가 막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노한 물결과 싸우는 바위같이 어리석은 마음이다. 물과 바위가 싸울 때 질 것이 바위인 것을 모를 사람이 없다.

물을 학생이라면 바위는 누군가? 정치다. 물은 연하고 바위는 굳으니 바위가 물의 가는 길을 막는데 걱정이 없을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바위는 아무리 굳어도 고립된 것이요 물은 연한 듯 해도 근원이 길다. 바위에는 끝이 있지만 물에는 끝이 없다. 하류 위에 상류가 있고 상류가 다 되어도 하늘에 무한의 근원이 있다. 그러니 유한한 힘을 가지고 무한한 근원에 맞섰으니 어떻게 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柔能勝剛이다. 학생은 柔다. 힘을 아니 가진다. 힘을 아니가지기 때문에 학생이다. 이제까지 학생이다가도 손에 칼을 드는 순간 학생 아니다. 학생이 학생으로 있는 한 常勝이요 莫强 이다. 이것은 우주의 법칙이다.

학생은 본래 권력과 싸우잔 것 아니다. 권력이 생명의 나가는 길을 막기 때문에 생명의 절대의 명령에 의해서 일어서는 것이 학생운동이다. 운동을 하던 개인 학생은 또 늙고 죽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에는 끝이 없는 것이 민중이 끝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학생의 데모는 자라나는 민중의 자각운동의 한 모습이다….

데모하는 그 건방진 자식 하나가 생기려면 얼마나한 수고와 밑천이 드는지 아는가?
이 억만년 진화의 전 우주가 일초도 쉬지 않고 일해서만 가능하다. 한 채찍 한 칼에 죽여 버리기에는 너무도 아깝고 너무 기특하지 않은가?
이번에 학생운동에 기독학생이 중심이 됐다는 것은 나는 크게 주의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번에 기독학생이 중심이 됐다는 것은 학생운동이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일단 높아지고 깊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코 망동이 아니다. 그들이 무지한 젊은이들이 아니다. 데모하면 어떤 어려움이 올 것인지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불행해질 수 있는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하는 것은 자기네로서는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하는 일이다. 절대 망동이라 할 수 없다. 나는 당국이 이들을 믿어주기 바란다.
첫째 그들에게는 3·1운동 이래의 전통이 있다. 아전인수격으로 하는 교파심에서 하는 말이 절대 아니다. 우리 최근사를 그대로 보고 하는 말이다. 일제시대에 있어서 민족 양심을 지키고 인도주의적 정신으로 그들의 모진 정치에 항쟁해 온 운동의 중심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이 기독교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 속에서 자라난 젊은이는 어느덧 그 정신을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우리 나라에 공산주의에 대한 방파제가 있다면 기독교를 내놓고 무엇이 더 강한 것이 있겠나? 아마 군대로는 차라리 못할지 몰라도 기독교로는 할 것이다. 이것은 내 체험으로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공산주의의 침입을 막는데는 첫째는 우선 빈부 권력의 차이 없는 평등 사회를 이루는 일이지만 그 담은 아무래도 기독교 정신을 철저히 보급시키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 기독교를 공산주의와 손잡았다고 한다.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일까? 당국은 제발 열 사람 공산주의자 잡으려 애쓰지 말고 한 사람 기독교인을 보호하기 바란다.>

나는 이 글을 처음 읽었다. 민주청년학생연맹 사건의 운동 그 자체의 중심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당시 기독교학생운동총연맹(KSCF) 이사장으로 이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이 사건을 이렇게 뜨거운 신뢰와 깊은 철학을 가지고 애정에 넘친 글을 접한 일이 없다.
최근의 우리나라의 복잡한 상황에 비추어 분명히 우리에게 30년 전의 이 글이 시사하는 바 크다고 사료되어 이번 회의 글 전체를 선생님의 글로 대신하였다. A4 용지 15매의 분량을 2매 정도의 분량으로 발췌했기 때문에 다소 이해하는데 무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대체로 당시의 민청학련사건에 대한 당국의 태도와 그 진상을 파악하는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독자 여러분들의 양해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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