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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예술장르의 퓨전적 시도들
각 예술장르의 퓨전적 시도들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4.05.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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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과 짬뽕을 넘어서

오늘날 예술에서 ‘퓨전’형식은 하나의 경향을 넘어 물결이다. 퓨전적 시도로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찾으려 한다. 과연 퓨전은 새로운 미학을 정립할 것인가.

미술 분야에서 퓨전을 보여준 건 가령 최근 16명의 작가가 벽화, 설치 등 다양한 방식으로 혼성을 보여줬던 ‘믹스막스’展이나, 미술과 무용의 혼합으로 이뤄진 공연 ‘공간의 기록’, 또 몇 해 전 전시장에 중국음식점을 차려놓아 미술과 요리를 하나로 결합시킨 ‘엘비스 궁중반점’展 등을 들 수 있다. 미술에 음악·무용·패션·요리를 들여온 이런 미학적 시도들은 센세이션을 동반한다. 그러나 과연 이걸 새롭고, 재밌고, 다양한 것으로만 볼 수 있을까.

이태호 홍익대 교수(미술평론)는 “모더니즘의 반성이라는 점에서 퓨전은 굉장히 긍정적이다”라 본다. 하지만 “우리 모더니즘 역사가 서구의 ‘양식’을 베낀 역사인 것과 마찬가지로 퓨전이라는 실험조차 서구 유럽의 것을 대거 수입해 재현하고 있다”라고 비판한다. 즉 현 미술계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퓨전적 시도의 상당수가 ‘주체성’과 ‘창조성’이 결여돼 있다는 지적이다.

음악은 퓨전형식이 가장 먼저 시도됐던 장르다. 1960년대 미국에서 전통 재즈로부터 탈피하고자 시작됐는데, 국내에선 1990년대 초 퓨전바람이 일어났다. 당시 한국판 퓨전뮤직의 결정판이라 평가받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는 음악계의 퓨전시대를 예고했다. 이후 대중음악 뿐 아니라, 박인수와 이동원, 김덕수 사물놀이패와 교향악단의 연주에서 볼 수 있듯 클래식과 팝, 대중음악과 국악은 장르를 오가고 동서양을 넘나들었다. 

하지만 이런 충돌과 혼합은 진정한 융합을 일으키고 있는가. 신성희 홍익대 교수(작곡)는 “가령 가야금으로 캐논을 연주하는 것은 퓨전을 시도했다는 데만 의의가 있을 뿐이다”라며 “새로운 제3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융합은 없다”라고 평가한다. 특히 요즘 주목받고 있는 퓨전국악그룹의 경우도 전통을 현대적 감수성으로 풀어내려는 시도는 인정할만 하지만, 전통적 요소를 물리적으로만 결합한 것 아닌가라는 비판도 나온다. 또한 일부 퓨전음악들이 대중의 욕구에 맞춰 ‘이지리스닝(easy-listening)’의 형태로만 간다는 지적도 있다. 그럼에도 “박승희나 퓨전그룹 ‘실크로드’의 국악가요 시도들이 마음에 들지 않고 실패할 수도 있지만 시도 자체를 너무 낮게 평가해서는 안된다”라는 작곡가 신동일 씨의 견해도 있다.

연극도 오래전부터 퓨전을 시도해왔다. 일찍부터 멀티예술이었던 것. 특히 요즘 영상이 대안적 언어로 부상해 연극은 표현력을 확장해가고 있다. 음악적 요소들도 활발히 도입된다. 이에 따라 배우들의 연기조차 바뀌고 있다. 부드러운 음악적 요소에 맞춰 연극의 행위들도 리드미컬해지는 것. 최근 퓨전연극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동서양을 넘나드는 작품을 선보인 연출가 양정웅 씨의 ‘멕베드’가 꼽힌다. 서구의 것을 차용했지만 내용을 한국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하지만 남상식 경기대 교수(연극이론)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방이 많다”라며 퓨전연극들이 서양 흉내내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남 교수는 “아직 한국연극의 퓨전형식은 실험단계일 뿐이며, 장르나 문화충돌 속에서 자기 정체성이나 타 장르에 대한 관용이 충실히 드러나는 단계는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영화의 경우 영화산업 자체가 글로벌한 것이라 퓨전형식은 불가피하다. 영화평론가 하재봉 씨는 “현대에는 단일한 시선으로 세상을 해석하면 통하지 않는다”라며 “다양한 관객의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퓨전영화가 필요하다”라고 예고한다. 최근 대표적인 퓨전사극으로 ‘스캔들’이나 ‘황산벌’ 등이 있다. ‘조용한 가족’, ‘간첩 리철진’, ‘주유소습격사건’, ‘반칙왕’ 등도 코미디나 드라마 등 한 장르에만 한정되지 않은 대표적인 퓨전영화로 꼽힌다.

김소영 한예종 교수(영화이론)는 퓨전영화들일수록 엄격한 잣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퓨전형식은 무엇보다 시대적인 긴장감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라는 것. 김 교수는 1970년대의 ‘하나의 독수리’,  ‘쇠사슬을 끊어버려라’ 등을 국내 최초의 퓨전영화로 꼽으면서, “당시 국내영화계는 국가주의적 사고관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이를 비판하기 위해 퓨전형식을 시도한 점이 돋보인다”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에 비해 ‘귀천무’와 같은 영화는 최악의 시도라 비판한다. “역사도 없고 문화적 구체성도 없고 말 그대로 짬뽕된 것일 따름이다”라는 게 그 이유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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