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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을 보는 세 시선, 대화가 '해법'을 연다
환경을 보는 세 시선, 대화가 '해법'을 연다
  • 구승회 동국대
  • 승인 2004.05.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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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사회를 위한 학술아젠다5:환경문제해결- 건강한 환경담론을 위하여

한국사회에서 환경문제는 좀처럼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서로의 입장에서 한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대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인 셈이다. 이에 먼저 한국의 환경담론이 가진 지형을 훑었다. 환경담론 이면의 권력구조를 점검하기 위해서다. 다른 한편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전제조건도 살폈다. 환경담론이 ‘구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를 끌어낼 수 매개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했다.

구 승 회 동국대/윤리학

환경문제는 세 차원에서 논의된다. 첫째는 현실의 환경문제에 직접 개입하는 사회운동의 차원이다. 이들은 대부분 환경론자, 혹은 환경지상주의자들이다. 다음으로 환경적 의사결정을 다루는 정책적 차원인데, 이들은 대체로 개발론자로 지목된다. 마지막으로 ‘개발이냐 보전이냐’라는 문제를 이론적으로 탐구하는 학술적 담론의 차원이다. 이들은 개발과 보전 중 어느 쪽이 유용성이 큰가를 논리적으로 계량한 다음, 편들기를 시도한다(그러나 환경적 가치는 계산가능하지 않다!).

먼저 환경운동의 담론부터 보자: 우리나라에서 모든 환경문제는 사회운동을 통해 ‘문제’가 된다. 이는 긍정적/부정적 결과를 낳는다.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면서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분명한 태도를 갖게 한다는 점에서,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는 사람들이 문제의 본질을 진지하게 숙고하게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환경운동가들이 주장하는 ‘파괴’는 사실은 환경적 가치의 파괴라기보다는 크고 작은 범위의 지역적 이해관계를 환경문제로 확대 포장하기 때문에 쉽사리 ‘생존권 문제’로 돼버린다. 지금까지의 모든 환경 대 개발의 갈등은 궁극적으로 ‘생존 투쟁’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환경주의의 역설’이라 할 수 있다. 즉 애초에 현실적 생존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바다를 메우고, 산을 뚥고, 핵폐기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개발론자의 주장은 사태의 마지막에 이르면 어느덧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환경론자의 구호가 돼 버리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부정적인 결과는 환경운동의 담론은 계층, 이념, 지역을 초월한 지구인 보편의 문제를 이념적, 계층적, 지역적인 문제로 몰아가는 경향이다. 환경문제의 본질이 그러하다기보다는 갈등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다.

환경주의의 역설과 도덕적 기회주의

환경적 의사결정을 다루는 환경정책은 다른 어떤 정치적 의사결정보다도 기회주의적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한데, 하나는 대부분의 환경적 의사결정은 구체적인 지역적 이익관심의 대상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환경정책은 국가의 균형발전과 국민 전체의 복지 증진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이는 항상 장기적이고, 그래서 예측 불가능한 반면에, 그 단기적인 위험과 파괴는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결집되는 ‘환경 이데올로기’와 쉽게 전선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회주의는 버나드 윌리암스가 말하는 이른바 ‘자비로운 부정행위’나 ‘비극적 선택’처럼 의도된 기만이나 부정행위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 앞에 ‘도덕적’이라는 한정어를 붙여야 정확할 것이다. 도덕적 기회주의는 공공선에 봉사한다는 이름 아래, 대중(시민)을 기만행위―이를테면 환경영향평가 공청회―에 동참시키거나, 공직자의 직업윤리에 따라 의사결정을 주도하기보다는 여론의 향배에 눈치를 살피고, ‘민주적 참여’와 ‘공적 인지책임(의사결정권을 가진 공직자는 어떤 의사결정을 함에 있어서 모든 이해 당사자에게 사안의 득실을 공개적으로 인지시킬 의무가 있다는 원칙)’라는 민주주의적 공적 토의의 이상 뒤에 숨어 사태가 충분히 악화되기를 ‘심각한 표정으로’ 기다린다. 동강댐 건설계획, 새만금 간척지 사업, 사패산 관통도로 건설계획, 위도 핵폐기물처리장 건설 계획 등 거의 모든 환경정책은 이런 도덕적 기회주의를 이용하여 ‘해결(?)’돼 왔다.

마지막으로 학술적인 환경담론을 보자. 이는 주로 철학, 사회학 정치학 등의 분과에서 논의되는데, 현실의 환경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그 문제의 배후에 관심 갖는다. 환경공학 등 기술과학은 실험과 데이터로 현실적 유용성의 크기를 계산한다면, 철학 등 인문학적 환경담론은 자연환경의 미적 ? 도덕적 가치를 논증하는데 주목한다.
학술적 환경담론은 위의 두 담론 집단에 정당화 논거를 제공하는 ‘이론의 도매상’ 역할을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들은 공학적 계산에 의한 득실보다는, 이런 윤리적 ? 미적 차원(예를 들면 동강댐 건설을 반대하는 중요한 논거로서 어라연계곡의 자연미학적 가치)의 논거를 훨씬 선호하고, 결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환경이론가들은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더욱 근본주의적이고, 프리미티브한 입장으로 경도된다는 점이다. 환경정책 담론 집단과 환경운동 담론집단 양쪽 모두에게 잘 팔리는 논변을 준비하려다 보니, 경쟁적으로 완고한 환경주의적-생태주의적 입장을 취하게 된다.

오늘날의 환경오염은 지구 역사상 유래가 없는, 결코 회복 불가능한, 인류의 절멸로 끝날 절망적인 위기가 아니며, 과학 기술적 예측은 현재 조건을 단순히 미래에 투사한 것일 뿐이며, 대부분의 강경한 환경론은 원시주의/신비주의와 결합한 일종의 문명적 퇴행이라는 논변은 어떤 지지도 얻을 수 없고, 팔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 사회엔 생태계 위기, 환경오염에 대한 의심과 반성적 사유를 시도하는 솔직한 이론가를 찾아보기 어렵다. 모든 환경이론가들이 이처럼 근본주의적인 입장에 서는 것은 ‘이론’의 성격이 무엇이건 간에, 일단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기본 노선이 이른바 개혁적, 진보적, 여성주의적, 친환경적임을 과시함으로써 매상을 올리려는 ‘이데올로기적 이중장부 관행’에서 비롯된 것 같다.

반성적 사유를 시도하는 이론가 없다

환경문제를 둘러싼 세 담론 집단의 긍정적/부정적 기능을 열거함으로써 이미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는 분명해진 듯하다. 우리 국민의 기질 상 다소 격렬하고, 쉽사리 극단화되는 것을 종종 목격하지만, 환경정책 입안자들은 환경적 의사결정에 앞서 개발 계획에 대한 분명한 ‘신념’으로 시종일관하고, 환경운동가들은 생존권 투쟁의 전위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고, 개발 반대가 곧 친-환경이 아니라는 역사상 무수한 인류의 대자연 활동의 긍정적 귀결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환경이론가들은 정부군과 반란군 양쪽 모두에게 무기를 팔아먹으려는 솔직하지 못한 태도를 버려야 할 것이다.

건강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자연환경의 보전과 보호를 간과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일치된 목표가 있는 한 언제든 합의는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대화는 계속돼야 한다. 상대방의 결정적인 사실적/도덕적 결함을 논증하려는 대화는 동시에 언제나 ‘자기-교정적 기능’도 수행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독일 다름슈타트대에서 ‘칼 코르쉬오 맑스주의의 역사화’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저서로는 ‘에코필로소피’(새길 刊), ‘생태철학과 환경윤리’(동국대출판부 刊), ‘아나키-환경-공동체’(모색 刊) 등이, 역서로는 ‘환경윤리학의 제문제’(따님 刊), ‘휴머니즘의 옹호’(민음사 刊)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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