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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경쟁으로 명문학과 문닫기도
자율경쟁으로 명문학과 문닫기도
  • 이택광 영국통신원
  • 승인 2004.04.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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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통신원리포트: 해외대학 학과 어떻게 운영하나(영국)

영국 대학의 의사결정 방식을 정의하자면, 한 마디로 ‘학과 마음’이다. 교수 선발부터, 학생선발, 그리고 예산집행까지 거의 모든 결정권을 학과가 갖는다. 예산배정도 오직 학과하기에 달렸다. 오히려 대학당국이 학과가 외부에서 수주한 프로젝트 연구비의 40%를 받아갈 정도다. 말하자면, 학과가 벌어온 돈으로 대학당국이 연명하는 방식이다. 물론 이 돈을 대학당국이 거저먹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대학은 자금줄을 끌고 오는 행동대원이기도 한 학과에 대해 전폭적 지지를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학당국은 대학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제외한 나머지 재정들을 다시 연구실적이 높은 학과별로 재배당한다. 영국의 학과들이 연구실적에 목을 메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연구실적이 높으면, 프로젝트를 많이 받아서 재정을 확충할 수 있고, 여기에 덧붙여 대학당국의 지원도 더 많이 받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영국 대학의 의사결정 구조는 학과의 자율성을 완전하게 보장해주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구 실적이 높아서 재정 확보가 잘된 학과는 교수도 많이 선발할 수 있고, 학생도 많이 뽑을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는 손가락만 빨고 있기 십상이다. 같은 인문학 분야라고 해도, 철학과와 영문학과는 천양지차다. 영미철학의 본고장이기도 한 영국에서 철학과는 컴퓨터 프로그램 언어학이나 정치학, 또는 경영학의 필수기초인 까닭에 다양한 학제간 연구 프로젝트가 가능하다. 반면 영문학은 그렇지 않다. 물론 일부 대학의 경우, 중세 고문서를 토대로 중세 영어의 문법이나 체계를 파악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곳도 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런 연구들은 영문학의 본령이라고 보기 어렵다. 사정이 이러하니, 영국 대학에서 가난한 학과를 들라면 공히 영문학과를 들 수밖에 없는 것이고, 곁가지로 설립한 영어교육센터 같은 곳에서 외국인 대상 영어교육으로 벌어들인 돈을 모학과인 영문학과가 얻어 쓰는 신세를 왕왕 목격한다. 그래도 영문학과는 얻어 쓸 돈이라도 있으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소수어문계열학과나 고전학과 같은 곳은 사정이 더 어렵다.

영국학계 뒤집은 버밍엄대학 '문화학과' 폐과사건

이런 자유경쟁 체제의 장점은 명확하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는 학과들이 자연스럽게 정리될 수 있다는 것. 물론 이런 장점을 상쇄하고 남을 폐해도 만만치 않다. 한때 문화연구의 발상지이기도 했던 버밍엄대학의 문화연구학과가 만성 재정적자에 허덕이다가 폐과되어 버린 것이 그 대표적 사례다. 대학 측은 폐과 조치를 발표하면서 1년의 이직 준비기간을 주었고, 이 학과에 재직하던 교수들은 대거 다른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이 사건은 영국 학계를 발칵 뒤집을 만했다. 영국적 학문의 대표주자이자 자긍심이기도 했던 문화연구의 발상지가 허무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는 또 있다. 샐포드 대학의 고전학과가 이런 경우. 이 학과 또한 재정적자를 극복하지 못하고, 폐과되어 버렸다. 사정은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라고 해서 좋을 게 없다. 고전학과처럼 인기 없는 학과는 전통만 장구할 뿐이지 재정이 없기에 신임교수들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실력 있는 교수를 확보하지 못하기에 장래성 있는 학생들도 뽑지 못하는 것이다.

학과 운영위가 절대적 권위를 갖는 이유

이런 까닭에 영국 대학에서 학과 운영위는 절대적 권위를 갖는다. 예를 들어, 신임교수 선발의 경우에도, 어떤 사람을 뽑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학과운영위에서 결판이 난다. 먼저 학과운영위가 열려서 올해 확보한 재정이 얼마고, 이를 토대로 몇 명의 교원을 더 충원할 수 있을 것인가를 논의한다. 이 논의에서 결정된 사항에 따라 교수 채용 공고를 내고,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임용 위원회를 선발해서 심사를 한다. 물론 이 임용위원회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전공적격여부를 심사하는 교수나 강사이다. 이들의 의견을 받아서 학과운영위는 교수를 채용한다. 한국 같으면 단골로 따라붙을 임용시비 같은 것은 거의 없다. 자격을 속인다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예산삭감이라는 엄혹한 현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연구능력이 미비한 사람을 “내 사람 심기”라는 차원에서 뽑는 학과는 공멸의 길로 빠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이택광 영국통신원/셰필드대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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