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의 사랑에 대하여
꽃들의 사랑에 대하여
  • 권오길 강원대
  • 승인 2004.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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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이야기

정말로 자연은 아름답다. 꽃피고 잎사귀 돋고, 흩날리는 蜂蝶에다 지저귀는 새소리가 아우러져 웅장한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지 않는가. 삼라만상이 기지개를 켜는 봄, 봄이 우리 곁에 온 것이다. 웬걸,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더니만 어느새 그 봄도 내 옆을 스쳐 지나치고 있다. 제행무상, 어디 한 자리에 마냥 머물고 있는 것이 있던가.

琪花瑤草가 봄맞이 오라고 요염한 손짓을 한다.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열어서 우리의 어머니,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 그들과 더불어 듣고 보며 봄을 즐겨볼 것이다. 꽃놀이 가자구나. 허나, 매섭게 아린 辛酸의 겨울이 있었기에 봄이 이렇게 따스하고 아름다운 것이리라. 고생을 해보지 않은 이가 어찌 진정한 행복을 안담.

더운 적도 지방의 벌은 꿀을 모으지 않는다. 안정된 환경에 사는 생물은 절대로 변화(진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까다로운 환경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바뀜이 생긴다. 모진 풍파를 이겨낸 높은 산꼭대기의 북쪽 나뭇가지로 악기를 만든다고 하지 않는가.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 법.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려운 환경을 이겨낸 이들이다. 더운 곳에 사는 벌이 먹을 것이 지천으로 있는데 왜 꿀을 따 모으겠는가. 그래서 그곳의 사람들도 매한가지로 게으르고 느려 터졌다. 아무튼 환경에 따라 생물의 행동과 습성이 달라지니 어느 하나 환경의 산물이 아닌 것이 없다.

흐드러지게 맵시를 뽐내고 있는 꽃으로 걸음을 옮겨보자. 꽃은 무엇이며, 왜, 어째서 저렇게 철 따라 피어나는 것일까. 꽃도 피는 순서가 조르르 정해져 있더라. 헌데 어째서 사람은 아래위도 없고 앞뒤도 없는가. 고얀 지고. 저 꽃들은 우리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울긋불긋, 형형색색으로 고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정녕 아니다. 애써 벌이나 나비들을 불러들여서 꽃가루를 암술에 달라 붙여 종자를 맺자고 저러고 있다. 꽃을 아주 좋아했던 식물학자로, 學名 쓰기를 창안해낸 유명한 분류학자인 스웨덴의 린네는 꽃을 무척 좋아했던 분이다. 그 분의 동상을 봐도 꽃 한 송이가 손바닥 위에 올려져있다. 가까이 오래 지내다보면 이야기 거리가 생긴다고 하던가. 꽃을 보고 그 양반이 엉뚱한 소리를 하신다. “가운데 자리에 한 여인(암술)이 드러누워 있고 둘레에 여러 남자(수술)가 둘러있어서 서로 사랑을 하는 것”이라고 갈파하였다. 맞는 말이다.

꽃은 식물의 생식기다. 그렇지 않은가. 동물은 생식기를 몸 아래쪽에 달랑 매달고 있는데 푸나무는 우듬지(줄기 끝)에 수줍음 하나 없이 덩그러니 물건(?)을 매달아 놓고 교태를 부리며 호객행위를 한다. 꽃이 좋아야 나비가 모인다고 하던가. 곤충을 꾀고 있는 꽃들이다. 사람도 그렇다. 그 꽃을 혐오스럽다거나 불경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되레 감상한답시고 음액의 향기를 코로 맡고 손으로 어루만지기를 마다 않고 있으니….

분명히 꽃은 벌레들이 옮겨다준 화분을 받아 자식(씨앗)을 만드는 식물의 생식기다. 그런데 꽃에 따라서는 꽃가루를 바람에 태워 날리는 것(風媒花), 곤충을 통해 옮기는 것(蟲媒花), 물을 따라 흘려보내는 것(水媒花) 등이 있다. 사막에서는 벌새(조류)나 박쥐(포유류)가 배달하기도 한다. “반가운 손님은 쉽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꽃들은 손님을 꼬드기기 위해 오만가지 향기에다 더없이 달콤한 꿀을 만들어 놓는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는가. 동물들이 꿀을 얻어먹는 대가로 화분을 옮겨주니 하는 말이다.

한 꽃송이에 암술과 수술이 다 있는 꽃을 양성화라 한다. 그런데 제 꽃가루를 암술에 묻혀주면 열매가 맺힐까. 과수원에서도 배나무나 복숭아, 자두나무를 여러 그루를 모아 심는다. 저 멀리 홀로 서 있는 자두나무는 암술수술을 다 가지고 있어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 어떻게 해서라도 다른 그루의 꽃가루를 받아서 씨를 맺겠다고 무진 애를 쓴다. 같은 꽃송이, 나무와의 꽃가루받이(受粉)를 꺼린다는 것이다.

제 꽃송이의 꽃가루를 받으면 열매가 맺히지 않는 것을 自家不稔 또는 自家不和合性이라 한다. 묘하지 않은가. 식물도 유전자가 비슷한, 가까운 사이에는 종자를 맺기를 피한다는 것이. 한 꽃에서도 수술보다 암술을 아주 길게 늘어뜨려서 자가수분(通情)을 피하는가 하면 암술과 수술의 성숙시기를 달리하여 제꽃가루받이(自家受粉)를 철저히 기피한다. 식물들이 영리하기 짝이 없구나.

지렁이나 달팽이는 제 몸에 정자를 만드는 정소와 난소를 모두 가지고 있는 자웅동체다. 그러나 반드시 다른 개체와 교미를 하여서 딴 정자를 받는 타가수정을 한다. 자가수정은 사람에 비유한다면 근친결혼인 셈이다. 자가수분을 하다보면 악성 유전자끼리 만나 불량형질의 자손을 낳기 쉽다하여 굳이 회피한다. 동성동본끼리 결혼을 삼가는 것이 그런 것이다. 놀랍다. 優生學은 우리보다 저들 동식물이 제 먼저 알고 있었더라.

권오길 / 강원대 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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