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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의 문지기’가 된 오늘의 대학
‘능력주의의 문지기’가 된 오늘의 대학
  • 박강수
  • 승인 2020.12.07 09: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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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니클' 미 대선과 고등교육 분석
여전한 피케티의 '다중엘리트체계'

 

학력은 계급이다. 교육 수준에 따라 접근 가능한 직업, 소득과 자산, 사회 경제적 지위가 결정되고 세습된다.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들어가거나 공직자가 되고 이 지위는 자본으로 환산, 축적돼 다시 자식 세대에 투자된다. 고등교육이 일종의 '신분제’를 떠받치는 코어 기둥 노릇을 하는 것이다. 몇 해 전부터 서구 사회에서는 이 새로운 사회계급 기준이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두고 각종 분석과 실증이 쏟아져 왔다.

지난해 4월 미국의 여론조사 기관 갤럽은 1999년부터 2019년까지의 조사 결과를 모아 그래프를 그린 바 있다. 백인 유권자 층을 대상으로 대학 졸업장 이수 여부와 정당 지지 사이 연관성을 추적한 통계 분석이다. 기사를 보면 지난 10년 사이 고등교육을 이수한 백인 유권자의 공화당 지지율은 51%에서 41%로 10%p 빠진 반면 민주당 지지율은 42%에서 54%로 12%p가 뛰었다.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진보 계열 정당을 선호하는 추세가 강화돼 왔다.

대학 졸업장이 없는 백인 유권자의 그래프는 반대로 움직인다. 해당 그룹에서 공화당 지지율은 지난 10년간 44%에서 59%로 무려 15%p 올랐고 민주당 지지율은 같은 44%에서 34%로 10%p 내려앉았다. 저학력자일수록 보수 정당에 점점 더 기울어 왔다. 요점은 ‘추세’다. 학력 수준에 따라 정치 지향이 점점 양극화되고 있다. 바로 이 사실을 정확하게 간파한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공화당 경선 과정에서 “나는 못 배운 사람들을 사랑한다”라고 솔직한 고백을 내비치기도 했다.

 

1999년부터 2019년까지 지난 10년간 백인 유권자 층에서 대학 졸업자와 비졸업자의 정당 지지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고학력자는 민주당으로, 저학력자는 공화당으로 점점 몰려 간다. 사진=갤럽 기사 캡처
1999년부터 2019년까지 지난 10년간 백인 유권자 층에서 대학 졸업자와 비졸업자의 정당 지지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고학력자는 민주당으로, 저학력자는 공화당으로 점점 몰려 간다.
사진=갤럽 기사 캡처

 

53개 대학에서 더 이긴 바이든

지난달 치러진 2020년 미국 대선에서는 어땠을까. 이 추세는 바이든을 당선시키고 트럼프를 떨어뜨린 선거에 어떻게 반영됐을까. 관련해서 초벌 데이터 분석이 나왔다. 미국의 고등교육 전문지 <더 크로니클 오브 하이어 에듀케이션>(이하 <크로니클>)은 지난달 15일 5개 주요 경합주의 선거 결과를 들여다보고 분석을 내놨다. 대상이 된 곳은 펜실베니아, 조지아, 애리조나, 미시간, 위스콘신이다. 2016년에는 트럼프가, 이번에는 바이든이 이긴 핵심 지역구들이다.

<크로니클> 분석팀은 5개 주 내부 카운티(미국에서 주의 하위 행정구역 단위) 중 대학 시설이 자리한 138개 카운티의 선거 결과를 조사했다. 그 결과 대학이 있는 지역에서 바이든이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는 점이 확인됐다. 카운티 숫자로 보면 트럼프가 이긴 곳이 87곳, 바이든이 이긴 곳이 49곳으로 열세처럼 보이지만 바이든이 이긴 지역에 인구와 캠퍼스가 몰려 있어 득표수를 따져보면 트럼프의 두 배를 넘었다는 것이다.

바이든이 이긴 지역에는 대학이 더 많았다. 간단히 말해 바이든은 191개의 대학에서 이겼고 트럼프는 138개의 대학에서 이겼다. 2016년 선거와 비교해 결과가 뒤집어진 카운티는 5곳에 불과했다. 하지만 전체 70%에 해당하는 다수의 (대학이 있는)카운티에서 민주당 득표율이 늘거나 트럼프 득표율이 줄었다. 2020년 대선에서도 고학력자일수록 민주당에 투표하는 경향성이 더 강화돼 나타난 셈이다.

 

'크로니클' 분석 결과, 5대 경합주 내 대학이 있는 카운티 대부분에서 지난 대선 대비 민주당 후보의 득표율이 증가했다. 위 그래프는 그 중 2016년에는 트럼프가 이겼다가 이번에는 바이든에게 넘어간 카운티의 득표율이다. 사진=크로니클 기사 캡처
'크로니클' 분석 결과, 5대 경합주 내 대학이 있는 카운티 대부분에서 지난 대선 대비 민주당 후보의 득표율이 증가했다. 위 그래프는 그 중 2016년에는 트럼프가 이겼다가 이번에는 바이든에게 넘어간 카운티의 득표율이다.
사진=크로니클 기사 캡처

 

사제와 상인, 두 엘리트의 공생

<크로니클>의 분석은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 이론에 대한 가장 최신의 업데이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자본』에서 점점 악화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불평등 구조를 통계적으로 실증하면서 경제학계의 ‘록스타’가 된 피케티는 지난 2018년 후속 연구를 냈다. 논문 제목은 「브라만 좌파 vs. 상인 우파: 증대되는 불평등과 정치 갈등 구조의 변화」다. 해당 연구는 보완을 거쳐 지난해 출간된 그의 신간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다시 다뤄졌다.

피케티의 이번 프로젝트가 내놓은 결론은 “서구의 주류 좌파 정당이 노동자들의 당에서 고학력자들의 당으로 변모하면서 불평등 문제를 정치적으로 다루는 데 실패했다”라는 것이다. 피케티는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과 프랑스, 영국에서 치러진 전국구 선거 데이터를 총망라해 유권자들의 성격이 변화하는 과정을 면밀하게 살폈고 공통의 패턴을 발견했다. 좌파 계열 정당의 지지층이 저학력 노동자에서 고학력자로 점차 물갈이되는 현상이다.

대체로 1950~1980년까지는 저학력자의 표가 더 많다가 1990~2020년으로 넘어가면서 전복되는 양태다. 미국 민주당, 영국 노동당, 프랑스 사회당, 독일과 스웨덴 사민당에서 약간의 시차를 두고 같은 그림이 반복된다. 좌파 계열 정당은 교육 수준에 있어 상위 계급에 속하는 엘리트들의 정당이 되어 간다. 이 좌파 엘리트들이 바로 카스트제의 사제 계급에서 이름을 따온 ‘브라만 좌파’다. 반면 부자들은 하던 대로 우파 정당을 찍는다. ‘상인 우파’다. 피케티는 이 공생 체제를 ‘다중엘리트 체계’라고 부른다.

 

지난 해 '자본과 이데올로기'를 출간한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사진=AP연합뉴스
지난 해 '자본과 이데올로기'를 출간한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사진=AP연합뉴스

 

불평등 정당화하는 능력주의

그 사이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대표자를 잃고 주류 정치 바깥으로 밀려난 저학력 노동자 계층은 토착주의와 반엘리트주의를 내세운 극우 세력에 포획된다. 피케티의 통찰은 2016년 트럼프 당선과 브렉시트로 촉발된 전지구적 정치의 실패를 교육의 계급화라는 관점에서 재구성한 것이다. 그는 “민주당 정부는 이 교육 분열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인민계급과 민주당의 초고학력 엘리트 사이 불신의 분위기만 조성할 뿐이다”라고 비판한다.

트럼프를 백악관에서 몰아낼 2020년 미국 대선은 이 흐름과 구조를 다시 한번 확증시켜 줬다. 이번 출구조사에서는 대학을 나온 백인 유권자의 51%가 바이든을, 대학을 나오지 않은 백인 유권자의 67%가 트럼프를 찍었다고 답했다. 이 균열은 더 뚜렷하고 깊은 형태로 앞으로도 반복될 확률이 높다. 즉, 피케티가 옳게 봤다. 국승민 오클라호마대 교수(정치학과)는 <시사IN> 기고에서 “미 대선의 궁극적 승자는 토마 피케티와 그의 신간”이라고 쓰기도 했다.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요점 중 하나는 어느 시대에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그 이데올로기는 엘리트 세력의 “서로 다르면서도 보완적인 두 개의 능력주의”라는 것이 피케티의 설명이다. 상인 우파는 능력만큼 벌어가는 것이, 브라만 좌파는 배운 만큼 가져가는 것이 정의라고 말한다. 그 사이 대학은 정치인과 유권자의 엘리트 카르텔을 매개하는 능력주의의 문지기가 됐다.

 

박강수 기자 pp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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