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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장님, 모든 문제를 알아서 잘 하리라 믿습니다”
“총장님, 모든 문제를 알아서 잘 하리라 믿습니다”
  • 윤형섭
  • 승인 2020.12.02 0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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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 총장 4년(1994.9~1998.8)의 회고 ③
현승종 전 총리를 추모하며...이사장과 총장의 대학이야기

 

현승종 전 국무총리가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모습

대학의 자율권 확보. 이는 적어도 대학인이라면 누구나가 입을 모아 절규하는 대학발전, 학문발전의 필수조건이다. 대학의 자율권을 말할 때 사람들은 흔히 정치권력, 정부로부터의 자율권을 말한다. 누구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아무리 대학이 권력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율권을 확보했다 하더라도 실천적 차원에서 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병폐가 현실대학에는 차고 넘친다.

실은 나도 1988년 한국교총 회장 취임 전부터 교육의 정치적 독립과 자율권을 외쳤다. 그 후 1990년 12월 말경 처음으로 국무회의에 참석했을 때 노태우 대통령께서 “윤 장관, 오늘의 대학이 안고 있는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시오?”하고 물었다. 모든 국무위원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뜻밖의 공세를 받고 놀랐으나 서슴치 않고, “대학의 것은 대학에 돌려줘야 합니다. 신입생 모집 정책에서부터 교수채용 등 모든 학사 정책 결정에 국가가 관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정부도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의외로 노 대통령은 흡족해 했고 배석했던 권 모 안기부장(지금의 국정원장)과 김 모 감사원장도 별도로 나를 격려했다. 그 후 나는 대학 자율화에 더욱 확신을 갖고 정책을 추진해 나아갔다. 

현승종 이사장, 원칙 고수의 리더십

그러나 주무장관이 되어 전국의 사립대학을 들여다보았더니 진정 심각한 과제는 ‘대학의 법인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심지어 어떤 대학의 경우 총장은 이사장의 수렴청정 하에 있었다. 이사장이 설립자인 경우는 더욱 심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관한한 모든 책임은 법적이든 사회적이든 불문하고, 총장에게 전가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건국대 현승종 이사장은 나에게 임명장을 주는 자리에서 “윤 총장님, 총장은 대학의 총책입니다. 모든 문제를 알아서 잘 하시리라 믿습니다. 쉽지는 않을 겁니다. 나도 성균관대에서 6년, 한림대에서 6년간 총장을 해봤지만, 그래서 이 대학에서 오랫동안 총장 자리를 비워 놓고 내가 직접 운영해 봤으나 전혀 성과가 안 납디다. 이제부터는 나는 원칙대로 법인의 고유 업무만 관리하고 학교 문제에서는 완전히 손을 뗄 겁니다. 그러니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원칙을 재천명한 이후 4년간 그분은 철저하게 그 원칙에 입각해서 인사, 재정, 건설 등 모든 학교운영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전적으로 총장에게 일임하였다. 물론 신임 총장에 대한 법인 내의 일부 토착 세력의 질시와 반발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정도는 사람 사는 곳 어디에서나 있는 일. 둔감하게 대응하면 절로 승부가 나게 되어있다. 

회고컨대 전국의 150여개 4년제 사립대학 중에서 아마도 나처럼 총장의 고유권한을 최대한 행사하며 행복하게 봉직한 총장도 많지 않을 것이다. 실례를 들면, 내가 4년 재임하는 동안 내 책임하에 전임교원 173명을 충원했다. 그중에서 단 한사람도 재단(법인)의 엄호나 특혜를 받은 사람은 없다. 특별히 고마운 것은 도리어 현승종 이사장께서 외부의 부탁과 압력을 나도 모르게 차단시켜 주었다는 사실이다. 교수 채용은 학과별 인사위원회, 단과대학 인사위원회, 대학본부 인사위원회(위원장 정길생 부총장)를 거쳐 총장에게 서열을 매겨 3배수가 올라오는데 내 손에서 뒤집힌 일이 여러 번 있었다. 모교 출신이라고 해서 특혜를 받았다거나, 특정 대학 출신 일색으로 당해 학과 교수진을 채워나간다거나 하는 조짐이 확실한 경우에도 이를 눈감고 싸인할 수는 없지 않은가. 후환이 두려워 눈감고 싸인한다면 이는 총장의 직무유기, 또는 책임회피 아닌가. 역시 뒤 끝이 시끄러운 일이 몇 번 있기는 했다. 예컨대 해당학과 교수 전원이 총장실로 항의차 집단 방문한다든지 하는 등의 시끄러움이다. 그러나 4년간 현 이사장은 교수 인사 건에 관한한 내게 단 한 번도 언급한 일이 없다. 진실로 원칙의 리더십이요, 겸허의 리더십이라 아니할 수 없다. 

건국대 새천년기념관
건국대 새천년기념관

건축 문제만 해도 마찬가지다. 내 경험으론 대학 재학생이 7천 명만 돼도 등록금 수입만으로 학교 운영이 가능하고 초과수입으로 2~3년마다 건설투자에 충당할 수 있다. 총장 취임 초에 내가 보기엔 건국대는 창설자 상허 유석창 박사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자산, 동문, 교수, 직원, 학생 등 수십만을 헤아리는 막대한 인적 자원, 그리고 서울 낙원동과 장안동, 충북 충주, 그리고 미국 L.A 등 도처에 갖고 있는 엄청난 물적 자원이 학교의 지속적 발전 가능성을 웅변하고 있었다. 이처럼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풍부한 정신적, 인적, 물적 자원이 대학발전의 효율적, 미래지향적 원동력으로 조직화되어 작동만 잘된다면 하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내 책임 하에 건국대 캠퍼스(서울 및 충주)의 현대화, 효율화, 미래 지향화에 착수했다. 정보화교육관, 국제화 교육관(지금의 새천년관)을 비롯하여 각종 건물의 신축과 증축·개축을 서둘렀다. 캠퍼스는 서울과 충주를 막론하고 연중무휴로 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랬어도 새천년처럼 내 임기 중에 완공치 못한 건축공사가 몇 개 있었다. 

대학경영이 기업경영과 다른 것

이러한 물리적·공간적 변화만이 아니라 행정제도의 변혁과 학사개혁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러한 변혁의 추세에 충격을 받은 것은 역시 건국대를 누구보다 사랑하며 오랜 세월 몸 바쳐 일해 온 교직원들이었다. 그러기에 직원노조에서 대자보까지 내다 부쳤다. 그 내용의 요지는 “우리가 수십 년 모아놓은 돈을 4년만 봉직하고 떠나겠다는 총장이 다 쓰고 우리에게 빚만 떠넘기고 갈 테냐?”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교실천정에서 비가 새고 대형선풍기를 틀어놓고 강의하는 상황에서 누굴 위하여 거액을 비축해야 했단 말인가! 원칙적으로 말한다면 대학의 등록금은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대학 발전을 위해서 재투자되어야한다. 대학이 장기간에 걸쳐 거액을 축적하는 것은 대학재정의 원칙에 어긋난다. 대학경영과 기업경영은 그 점에서 엄격히 구분되어야한다. 그 노조 대자보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나는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너털웃음으로 대응하였다. 나는 하늘이 내게 준 소명으로 알고 내 길을 갔다. 그때 나를 진정으로 신뢰하고 든든한 방호벽의 역할을 해주신 분이 바로 현승종 이사장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본교 캠퍼스 한복판에 있던 상허 선생(설립자)의 동상을 어렵게시리 상허기념관 앞으로 옮긴 것도 그 때의 일이다. 역시 정서적인 반발이 있었다. 그것들이 지금은 건국대의 상징적 홍보물이 되어있음을 볼 때마다 나는 뿌듯하고 행복하다. 이 모든 변혁들은 건국대가 현승종 리더십의 합리적 체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했던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학발전이란 기존의 제도와 문화를 개혁하고 학문과 교육을 선진화하는 것이므로 기존의 권위와 질서에 도전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것은 하나의 전쟁이기도 하다. 

나는 4년의 짧은 세월 속에서 현 이사장으로부터 철저한 원칙주의를 배웠다. 한 가지만 그 실례를 든다. 어느 날 놀라운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 결과 그와 나는 시내 모처에서 첫 상봉을 하였다. 그는 모 재벌그룹의 주인이었으며 모 대학교의 이사장을 겸하고 있었다. 그의 그릇된 학교재정 운영행태가 1997년 IMF 사태의 쓰나미에 걸려 형사법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게 급히 자기의 그 대학교를 인수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즉각 학교로 돌아와 현승종 이사장실 문을 두들겼다. 사안의 전후좌우를 설명하면서 “이사장님, 저 아래에 건설 중인 저 건물(지금의 15층 새천년관이다)을 보십쇼. 건축비가 300억도 안 됩니다. 바로 저 건물 한 채 값도 안 되는 돈으로 어마어마한 물량의 대학교를 인수하자는 것입니다. 결단을 내리시죠.” 강력한 나의 주장이었다. 나는 확신했다. 현 이사장께서 쾌재와 만세삼창을 부를 줄 알았다. 아뿔싸! 대답은 정반대이었다. “대단히 매력적인 제안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오너가 아닌 고용된 이사장으로서는 그런 일은 나의 권한 영역을 벗어납니다. 그러니 수용할 수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나는 놀랐다. 남들은 나도 대단한 원칙주의자라 하건만 현승종 이사장의 원칙 선언 앞에 그만 손을 들고 말았다. 나는 지금도 그 대학 앞을 승용차로 한참을 지날 때마다 그날의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그날 현승종 이사장으로부터 받은 원칙 고수의 교훈은 평생토록 나의 공직 수행에 유익한 좌우명이 되고 있다. 

 

윤형섭 연세대 명예교수·단국대 석좌교수

연세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했다. 연세대 교수를 거쳐 교육부 장관(1990.12.27.~1992.1.22)을 지냈다. 한국정치학회 회장과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서울신문>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으며 건국대·호남대 총장을 지냈다. 현재 연세대 명예교수와 단국대 석좌교수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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