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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사상의 정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사상의 정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이혜인
  • 승인 2020.11.23 10: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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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 그에게 삶의 의미를 묻다 | 저자 박찬국 | 세창출판사 | 344쪽

서울대 박찬국 교수의 명강의로 다시 태어나다!

누구나 한 번쯤 ‘니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울러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역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해서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주변에서 그 책을 완독하고, 완전히 이해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은 별로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우리도 장바구니에 넣어 둔 채 선뜻 구매하지 못하고 있거나, 용기 있게 구입했지만 첫 장을 겨우 읽고는 바로 덮어 버린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가 책 읽는 능력이 부족해서 완독에 실패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K-MOOC에서 진행된 〈니체 읽기 – 인문고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강의 원고에서 시작됐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인생에 한번쯤 꼭 읽어 봐야 할 고전이지만, 난해한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하여 해독이 거의 불가능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첫 장을 읽다 좌절한 우리를 위해, 친절하고도 깊이 있는 해설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저자의 결심이 이 책을 완성시켰다. 이제 니체 전문가 박찬국 교수의 친절한 해설로 다시 살아난 차라투스트라를 만나, 힘들고 지친 우리 삶의 의미를 물어볼 시간이다.


“신은 죽었다!”
우리가 알던 세상의 모든 질서가 무너졌다

서양의 중세 시대에는 ‘신’이 곧 세상의 진리였다. 모든 이들의 삶과 사상이 신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신의 뜻에 따라 내 삶의 의미와 방향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과학과 철학의 발달로, 신의 존재는 점차 부정되어 갔다. 학자들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일반 민중들에게는 아니었다. 삶의 단 하나의 진리, 신이 사라진다는 건 민중들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중세 시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과도기에는 민중들 사이에 상상할 수 없는 혼란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패러다임을 바꾸는 거대한 사건 뒤에 사람들은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며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2020년,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며 거대한 혼란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던 일상이 제한당하고, 대면 시대에 적합했던 세상의 질서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코로나 블루’라는 이름의 우울감을 겪으며 삶은 더욱 감당하기 힘든 것으로 변하고 있다. 신이 죽은 근대를 맞이한 민중들처럼, 우리도 대면 시대의 질서가 무너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혼란을 겪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이 바로 뉴노멀(New-Normal)의 시대라고 말한다. 기존의 질서가 무너진 폐허에서, ‘나’ 자신이 새로운(New) 표준(Normal)이 되어 새로운 질서를 세워 나가야 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다. “과거의 질서에 얽매여 있는 자신을 극복하고 새로운 자기를 획득하라!” 차라투스트라는 신이 죽은 세상에서 새로운 자기를 세우는 방법을 가르친다. 이는 무너진 질서 속에서 새로운 일상을 세워 나가야 하는 뉴노멀 시대의 우리에게도 우울함과 무기력함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그것이 삶이었던가? 자! 그럼 다시 한번!”
허무주의란 힘에의 의지로 충만한 삶

니체는 평생 병을 달고 살아서, 교수직마저도 10년 만에 내려놓고 인생의 절반 이상을 병상에서 보냈다. 살아생전에는 아무도 그의 사상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아서, 평생 고독한 시간을 보낸 비운의 철학자이기도 하다. 과연 니체는 삶의 무엇이 좋아서 끔찍한 생이 다시 오기를 바라는 걸까?
삶이 힘들기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는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만 하느라, 대학생이 되어서는 취업준비를 하느라, 취업하고 나서는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점점 멀어지는 내 집 마련의 꿈,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결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사회생활. 삶의 의미도, 목적도 잃은 채 하루하루 버티기만 하는 인생…. 생각해 보면 힘들고 지치는 일만 가득한 삶을 몇 번이고 다시 반복한다니? 이것이야말로 끔찍한 일이 아닐까?

차라투스트라는 우리가 의지할 만한 신도 죽었다고 말했고, 원인 모를 고통으로 가득한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고도 말했다. 허무주의에 빠지기 쉬운 주장이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허무주의는 “모든 게 헛되다, 모든 게 부질없다, 모든 걸 체념한다” 등으로 귀결되는 패배주의가 아니다. 니체가 젊은 시절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에 큰 영감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생존하려는 본능에 따라 맹목적인 생존 의지를 갖고 살아갈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니힐리즘’이라고도 불리는 니체의 허무주의는 인간이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가 아니라, 초인을 향한 힘에의 의지로 살아간다고 본다. 우리는 영원히 반복되는 고통스러운 삶 앞에서도, 끊임없이 힘을 추구하기 때문에 모든 고통을 계속해서 극복하려 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려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차라투스트라가 가르치는 초인의 삶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왜 이런 힘든 일이 생기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한고비를 넘으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새로운 어려움이 불쑥 찾아온다. 차라투스트라의 말에 따르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도 우리가 가진 자연스러운 본능과 욕망을 따라 온몸으로 삶을 맞이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흔히 ‘아모르 파티(Amor Fati)’라고 불리는 운명애(運命愛)는 운명 앞에 굴복하는 마음이 아니다. 모든 번뇌를 내려놓고 인생의 풍파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도 아니다. 영원히 반복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인정하되, 끊임없이 반복되는 고통을 넘치는 생명력으로 극복하는 자세다.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망, 힘에의 의지를 그대로 인정하고 분출하여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사는 자세다. 영원히 반복하여 찾아오는 고난의 삶이 운명이라면, 이를 매번 극복하려고 힘을 내는 것 역시 우리의 자연스러운 운명이다.


“인간은 초극되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다!”
끊임없이 나를 극복하는 삶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인간은 초극되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다.”

- 본문 중에서

니체는 인간의 정신이 ‘낙타-사자-아이’라는 세 가지의 과정을 거쳐 성장한다고 보았다. 차라투스트라는 세 가지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다. ‘낙타’는 남이 시키는 대로, 종교나 사회, 부모님이 주입한 가치를 따라 사는 정신을 말한다.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고 시키는 대로 사는 게 편할 수도 있다. 문제는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벌어진다. 이때 인간의 정신은 사자로 변모한다. ‘사자’는 정신적인 자유를 얻고 자기 삶을 찾아 나서지만, 특별한 목표를 정하지 못해 허무함에 빠진 정신이다. 어떻게 사는 게 후회 없이 사는 삶인지, 내 욕망을 따라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되는지 고민하고 망설이는 정신이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발전하게 되면 비로소 아이의 정신이 된다. ‘아이’는 반복되는 삶과 수많은 갈래로 갈린 선택지 앞에서도 고민하지 않는 정신을 말한다. 모래성을 쌓고 부수기를 반복하면서도 질리지 않고 즐거워하며, 어떤 사회적인 시선이나 제약에도 거리낌 없이 욕망을 따라 자유롭게 산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낙타-사자-아이’의 과정은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지나는 과정이 아니다. 낙타가 사자가 되고, 사자가 아이가 되려면, 그 사이사이마다 철저한 ‘극복’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삶을 놀이하듯이 사는 아이의 정신이 바로,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초인의 정신이다. 그리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은 초극되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라고 힘주어 말했던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에 맞춰 자연스러운 나 자신을 억누르고 있지는 않은가? 삶의 의미를 잃고 허무함과 무기력함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과연 어떤 방법으로, 나의 무엇을 극복해야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아이로 나아갈 수 있는 걸까? 나는 나를 극복할 수 있을까? 차라투스트라는 우리에게 자신을 극복하고 초인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소개한다.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혼돈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삶의 의미를 묻는 나에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어렵다.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일상을 스스로 깨는 일은 어려운 걸 넘어 두렵기까지 하다. 새로운 길을 가 보려고 해도 선택지가 너무 많아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지내도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누군가 내게 가야 할 길을 확실히 알려 준다면 괜한 고민을 할 필요도 없다. 인생은 알 수 없는 돌발상황의 연속이라는데, 어떻게든 안정적인 직장,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어서 인생에 벌어질 돌발상황을 줄이고 싶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마음을 ‘중력의 정신’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신나게 뛰놀며 춤추듯이 살아야 하는데, 자꾸만 과거의 평안을 지향하는 마음이 중력처럼 우리를 짓눌러서 땅에 딱 붙어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니체가 살던 시대에는 서양 기독교의 금욕주의가 인간의 여러 욕망을 억누르고 있었다. 지금도 개성과 특수성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우리를 억압하고 있다. 양심이나 신념이 가장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을 지우기도 한다. 양심은 지켰을 때 나에게도 행복을 주어야 한다. 만약 ‘착한 아이 증후군’처럼 지킬수록 나의 내면을 갉아먹는 양심이라면, 이것 역시 나를 억압하는 굴레일 뿐이다. 그럼에도 내가 사회에 편입되지 않으면, 내가 하던 대로 하지 않으면 배척당하고, 비난을 받을까 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차라투스트라는 고통으로 점철된 삶이 영원히 반복되고, 안락한 과거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우리를 짓누른다고 말한다. 몇 번을 마주쳐도 낯설고 두렵기만 한 세상 앞에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잃고 깊은 우울감에 빠진다. 나는 왜 살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렇게 사는 게 올바른 걸까? 발버둥 칠수록 깊은 수렁으로 빠뜨리는 늪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나를 괴롭히는데, 차라투스트라는 다가와 아예 절벽 끝으로 나를 내모는 것 같다.
그러나 한 발자국만 앞으로 내디뎌 보자. 마음속에 혼돈이 가득한 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마음속에 혼돈을 간직한 사람만이, 춤추는 별, 초인을 탄생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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