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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통합적 지식과 공공성
<만파식적> 통합적 지식과 공공성
  • 교수신문
  • 승인 2000.11.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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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1-09 13:08:54
 ◇ 이정옥 (대구가톨릭대·사회학 )
한반도에는 세계 최장기수도 있고, 민주주의를 위한 강도 높은 투쟁도 있고, 냉전의 칼바람 속에서 평화를 위해 노력했던 시도도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받은 노벨상은 한반도라는 극동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 받은 상이기도 하다. 동서와 남북, 남녀, 노소를 떠나 한마음이 되어 중심부에서 비춰주는 햇살을 기꺼워하였다. 김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은 한반도가 세계에 문을 연지 1백년만에 맞는 경사였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1천엔 짜리에는 근대문학의 아버지인 나쓰메 소세끼가 있고, 1만엔 짜리에는 근대교육의 아버지인 후꾸자와 유기치가 딱 버티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세종대왕과 퇴계 선생을 뛰어넘는 근대사의 인물을 만들어 내지못했다. 민족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은 테러리스트이었거나 암살로 인해 불운한 생애를 마쳤다. 복을 비는 돈에 넣기에는 조금은 꺼림직 하지 않은가. 근대를 고민했던 지식인은 ‘반민족적’이라는 낙인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과거의 비극은 오늘의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바로 당파성이 공공성으로 포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의약분업의 문제에서부터 구조조정의 문제, 심지어 남북 화해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당파적인 입장의 나열만 있을 뿐 통합은 그 어디에도 없다. 노벨상 수상의 심사 마지막 단계에서도 야당은 국회에서 로비 설을 제기했으며, 전직 대통령은 ‘노벨상’의 수상 자체를 비난했었다. 지역에 따라 노벨상을 보는 시각도 팽팽히 맞섰다. 허심탄회한 축하를 보내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노벨상과 남북화해를 위해 치른 비용이 올 겨울을 더욱 춥게 만든다고 보는 지역도 있다.
통합과 공공성을 만들어 내는 책임은 지식인에게 있다. 시애틀에서 프라하로 이어지는 세계시민운동의 등장은 바로 프랑스 지식인의 ‘참여’의 결과였다. 그들은 OECD의 다자간 투자협상이 타결될 경우, 파리에 헐리우드가 입성하게 될 때 따르는 문화적 자존심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자존심의 문제는 경제의 문제로 이어져 다자간 투자협상이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 지를 쉬운 언어로 밝혀내었다.
그들의 연구결과는 프랑스 의회에서 채택되어 다자간 투자 협상을 유보하게 만든 것은 물론 전세계로 전파되어 시애틀에서 지적재산권 서비스업 등을 자유무역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저지하였다. 현실에 대한 레이다 망을 가진 저널리스트, 저널리스트의 감각을 받아 이루어지는 치밀한 연구 분석, 분석의 결과가 정책의 변화로 이어지는 일련의 드라마를 보면서 현실을 구성해 가는 통합적 지식의 힘을 보게 된다.
에드가 모랭이 시애틀에서 21세기가 시작됐다고 외치고, 신문의 전면이 시애틀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세계시민사회운동을 분석하고 있을 때에 우리의 신문은 옷 로비 사건의 앞 얘기 뒷 얘기에 지면을 다 할애하고 있었다. 주식시장이 달아오를 때 신문들은 앞다투어 연일 주식으로 한몫 잡은 소시민의 일화를 소개했고, 주식시장이 냉각될 때에는 주식으로 패가망신한 사례를 다루고 있었다. 공기업 민영화의 문제점과 신자유주의 개혁의 문제가 시애틀과 프라하에서 지식인과 시민의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될 때 우리의 지면은 앞 뒤 맥락 없이 공기업의 부실문제와 부패문제를 느닷없이 들고 나왔다. 공공지식의 실종을 보여 주는 우리의 현 주소이다.
21세기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20세기, 더 나아가서는 19세기를 뿌리로 하여 오는 것이다. 유럽의 지성인들은 20세기에 이루었던 근대의 성과물로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조정을 서슴없이 꼽는다. 21세기의 제2의 근대는 시장에 대한 조정과 개입을 세계적 차원에서 마련하는 것이다. 시장에 대한 개입의 명분이 공공성과 투명성을 기초로 한 경험이 바탕이 된 나라에서는, 시장은 공공의 합의를 기초로 하여 당연히 조정되어야만 한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시장에 대한 개입이 당파적 이해의 실현 또는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악용되었던 나라는 거짓말의 대가로 진짜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양치기 소년의 운명이 된다. 시장 개방을 부패로부터의 해방으로 착각한 나머지 저항 한 번 없이 스스로 다국적 기업의 먹이가 되어 주는 나라들이 연신 등장하고 있다.
이제 노벨상을 개인의 영광에서 우리의 영광으로 만드는 작업은 지금부터이다. 그것은 남북, 동서, 남녀, 빈부의 벽을 허물고 ‘우리’의 영역을 만들어 낼 때 가능한 것이다. 대학은 ‘우리’를 만들어 내는 산실이다. 대학 마저 시장의 도구가 된다면 ‘우리’를 만들 터전을 잃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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