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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서 철학자가 깨달은 ‘사랑의 입증’
죽음 앞에서 철학자가 깨달은 ‘사랑의 입증’
  • 김재호
  • 승인 2020.11.20 11: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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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읽기_아침의 피아노
김진영 지음 l 한겨레출판사 l 284쪽

사랑은 부끄러움을 깨닫는 찬란함
사랑했음에 대한 알리바이가
바로 존재의 목적이다

죽어가던 철학자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젠 고인이 된 김진영(1952∼2018). 그는 철학자이자 미학자로서 독일에서 수학했다. 철학아카데미 대표이기도 했던 김진영은 자본주의 문화와 삶이 갇혀 있는 신화성을 드러내고 해체하는 일에 몰두했다. 김진영은 2017년 7월 암 선고를 받고, 13개월 동안 환자로서 겪은 일들과 생각들을 정리했다. 

 

『아침의 피아노』는 김진영이 환자로서, 한 개인으로서 주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았다. 짧은 글들이 대부분이지만 그 속엔 사랑, 자유, 희망, 주체, 아름다움, 삶 등 인문학의 모든 주제들이 담겼다. 김진영은 임종 3일 전까지 병상에 앉아 기록을 남겼다. 

자신의 죽음이 예견된 철학자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김진영은 멀리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어떻게 응답할지 고민했다. 그는 질문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피아노는 그저 사랑이라는 것. 피아노에 응답해야 하는 것은 사랑뿐이라고 적었다. 

그는 ‘김진영, 낯선 기억들’ 칼럼을 연재한 바 있다. 거기서 김진영은 “사랑의 환희 앞에서, 찬란하고 투명한 빛의 충만함 앞에서 더는 숨길 수 없는 누추했던 삶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그때 우리는 새들처럼 그늘로 숨어들어 거기에 둥지를 튼다. 그리고 모든 절정의 찰나처럼 한순간 빛나고 사라질 덧없는 찬란함은 그 둥지 안에서 사라지지 않은 채 온전히 간직된다. 부끄러움이라는 파수꾼이 그 둥지를 지키기 때문이다”이라고 적었다.(<한겨레> 2018년 5월 31일자 ‘찬란함을 기억하는 법’) 사랑이란 부끄러움을 들춰내는 찬란함이다. 

 

고 김진영 철학자는 죽음 앞에서 기록으로 맞섰다.
그가 깨달은 건 사랑의 입증이었다. 사진 = 이해수

철학과 미학이 죽음을 말하는 법

환자가 된 철학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환자의 삶이란 타율적으로 세상과 인생을 너무 열심히 구경하는 것이라고 김진영은 적었다. 그는 “베란다에서 세상의 풍경을 바라본다. 또 간절한 마음이 된다.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지면 얼마나 좋을까”라며 “내가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내가 끝까지 사랑했음에 대한 알리바이이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죽음에 이른 철학이 깨달은 건 사랑의 흔적과 입증이었던 셈이다. 병에 대한 면역력은 정신력이고, 최고의 정신력은 사랑이라는 귀결이다.   

환자의 정체성에 대해 김진영은 자신의 몸이 타자들과의 관계에 놓이는 것이라고 바라봤다. 그런데 그 타자는 각자의 몸 속에도 있다. 김진영의 표현을 빌리면, “환자는 그 타자가 먼저 눈을 뜨고 깨어난 사람이다. 먼저 깨어난 그 눈으로 생 속의 더 많고 깊은 것을 보고 읽고 기록하는 것”이 환자의 주체성이다.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 김진영이 깨달은 자유는 “그건 몸과 함께 조용히 머무는 행복”이다. 또한 존재의 심연에 이르러 고요의 말을 깨달았다. 그저 조용히 있는 침묵이 아니라 ‘고요의 말’이 존재의 바닥에 있다고 김진영은 알아챘다. 우리 모두는 그 말 한마디를 찾아 헤매는 구도자이다.  

고요의 말을 찾는 구도자들

생의 의지를 불태워야 하는 건 늘 진리다. 김진영은 “사는 건 늘 새로운 삶을 꿈꾸는 것이었다”며 “그래, 나는 사랑의 주체다. 사랑의 마음을 잃지 말 것. 그걸 늘 가슴에 꼭 간직할 것”이라고 당부한다. 죽음에 이른 철학자의 호소이다. 따라서 그 사랑의 관계를 제대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건 바로 남을 위해 나를 헌신하는 것이다. 

죽음의 기록을 남긴 것조차 타인을 위한 일이었다. 김진영 자신의 쓰임새는 마지막까지 타인을 향했다. 병중의 기록은 그가 가도 남을 이들을 위한 것이다. 타자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김진영은 존재의 확실함을 느꼈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한 개체의 내면 특히 그 개인성이 위기에 처한 상황 속 개인의 내면은 또한 객관성의 영역과 필연적으로 겹치기도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적었다. 아무리 힘든 각자의 삶이라도 우리라는 인생에 중첩된다. 

낯선 지구에 사는 인간은 모두 외롭다. 다만, 김진영과 같은 철학자들의 다음과 같은 말이 그 외로움을 덜어준다. “타향의 삶을 고향처럼 살았던 사람만이 귀향의 꿈과도 만나는 건지 모른다... 한 생을 세상에서 산다는 건 타향을 고향처럼 사는 일인지 모른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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