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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승종 전 총리의 전화…장관직 물러나게 했던 대학으로 오라니
현승종 전 총리의 전화…장관직 물러나게 했던 대학으로 오라니
  • 교수신문
  • 승인 2020.11.1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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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 총장 4년(1994.9~1998.8)의 회고 ①
현승종 전 총리를 추모하며… 이사장과 총장의 대학이야기

올해 5월 25일, 현승종 전 건국대 이사장이 101세로 서거했다. 노태우 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였던 그는 총리 퇴임 직후인 1993년 5월부터 1999년 7월까지 6년간 건국대 이사장을 지냈다. 그의 부름으로 건국대 총장(1994.9~1998.8)을 맡았던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은 “나의 총장시절 4년을 회고하면서 몸으로 겪은 현승종 이사장을 추모하며 그의 리더십을 실증적으로 분석하는” 글을 보내 왔다. 유서 깊은 한 사립대학의 이사장과 총장의 알려지지 않은 ‘대학 이야기’를 싣는다. 

오호! 애재라. 2020년 5월 25일 현승종 전 건국대 이사장의 서거 소식을 들었다. 온 세상이 코로나19로 위기감에 빠져있을 때였다. 내가 현승종 이사장을 4년간 몸으로 겪은 것은 그의 총리 시절이 아니라 건국대 이사장 시절이었다. 그의 총리 시절에는 나는 <서울신문> 대표이사·사장(발행인)으로서 그분에 관련된 기사에 소홀함이 있을까 봐 신경을 썼을 뿐이었다. 더욱이 직전까지 환골탈태의 몸부림을 치고 있던 한국교총의 내 바로 후임 회장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그분이 바로 그날 101세로 서거하셨다는 언론보도는 기사 제목에서 대부분 그를 전 총리로 호칭하고 있음에 주목하게 되었다. 더러는 기사 내용에서 전 한림대 총장 또는 전 성균관대 총장 경력을 언급하고 있기는 하였으나 6년간(1993.5.~1999.7) 재임했던 건국대 이사장 경력은 거의 언급한 바가 없었다. 총리 재임 기간은 불과 5개월(1992.10.~1993.2) 미만이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우리 사회의 인식 성향과 눈높이에 맞추어 나도 이글의 부제를 그렇게 맞추기로 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내가 현승종 이사장의 임명을 받고 만4년 간 총장으로 봉직했던 기간(1994.9~1998.8)을 회고하면서 내가 몸으로 겪은 인간 현승종을 추모하며 그의 리더십을 실증적으로, 분석적으로 논하려 한다. 

노태우 정부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낸 고 현승종 전 총리의 국무회의 주재 모습.
노태우 정부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낸 고 현승종 전 총리의 국무회의 주재 모습.

현 총리께서 작고한 다음 날(5월26일) 아침에서야 나는 모 일간지의 관련 기획 기사를 통해서 자세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그 기사에는 “고인의 뜻을 받들어 조용히 가족장으로 모실 것이며 일체의 조문과 조의를 정중히 사절한다”라는 유족 대표의 뜻이 밝혀져 있었다. 그날 점심에 약속대로 이홍구 전 총리와의 사적 만남이 있었는데 그는 조간신문을 못 읽고 빈소에 갔더란다. 조객이 전무하고 분위기마저 썰렁하여 매우 섭섭한 감을 금할 수 없었다 했다. 7월초에 있었던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백선엽 장군의 장례행사에 비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속세의 인심 동향을 들여다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조간신문의 부음기사를 보고 순진하게 상주의 말씀을 따르는 바람에 현 총리 가시는 마지막 길의 배웅조차 못 한 내가 원망스럽고 도리어 신문을 안 본 덕에 문상을 다녀올 수 있었던 이 전 총리가 부끄럽기조차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뒤늦게나마 그 어른의 영전에 바치는 심정으로 나의 총장시절 4년을 회고하면서 나를 이끌어 주었던 현승종 이사장의 리더십을 추모하고자 이 글을 쓰고 있다. 

왼쪽에서 여섯번째가 윤형섭 전 총장, 오른쪽 바로 옆이 현승종 전 이사장이다. 사진=건국대
왼쪽에서 여섯번째가 윤형섭 전 총장, 오른쪽 바로 옆이 현승종 전 이사장이다. 두 사람이 함께 건국대에서 총장과 이사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이다. 사진=건국대

현승종, 의지와 정밀의 리더십 

1994년 8월의 어느 날,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전화를 받았다. 건국대 이사장 현승종 전 총리의 전화였다. “내일 아침을 쉐라톤 워커힐호텔에서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움과 중압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찍이 내가 Y대학교 대학원 원우회장(초대지금의 대학원 총학생회장)으로서 이 대학 저 대학을 두루 살폈을 당시에 그분은 이미 고려대 법과대학 로마법전공 교수로서 학생처장을 겸하고 계셨다. 학자로서만이 아니라 행정가로서도 명성을 떨치고 있음을 나는 그때 충분히 알게 되었다. 그것이 바탕이 되었음인지, 그는 성균관대 총장, 한림대 총장, 한국교총 회장, 국무총리를 거쳐 건국대 최고책임자인 법인 이사장을 맡게 되었고, 그로부터 이미 1년 3개월이 지났다. 말씀대로 워커힐 일식당에서 조심스럽게 조찬을 함께 들었다. 이런 사적 만남은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비록 그분이 한국교총의 바로 내 후임 회장이었기는 하나, 그리고 내가 교육부 장관 재임 중 그 분은 한국교총 회장으로서 나와 단체교섭을 벌린 일이 있기는 하나 이렇게 사사롭게 대화하면서 식사를 같이 한 일은 전무하였다.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현승종 이사장께서 입을 여셨다. “건국대 총장으로 와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즉석해서 사양하였다. 그 당시 건국대 내부사정이 몹시 어렵다는 정도는 나도 이미 알고 있었던 터였다.


여기서 잠시 나와 건국대와의 악연을 고백해야겠다. 1991년 내가 교육부 장관으로 재임 중이었을 때 건국대 교직원들에 의한 학내 비리 고발 투서가 교육부 감사관실에 쇄도했고 이미 유력일간지 사회면의 톱기사로 대서특필이 잇달았다. 나로서는 건국대에 감사반을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들이 출발하기 전에 전원을 장관실에 집합시켜놓고 신신당부하였다. 첫째, 교육부의 본분은 대학을 보호하고 지원하는데 있음을 명심하라. 둘째, 생수 한잔일지라도 대학에 신세지지 말고 미리준비해가라. 


근 일주일간의 감사가 무사히 끝났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후속 조치를 모두 끝내고 났더니 이번에는 모 유력일간지를 필두로 ‘교육부 감사는 솜방망이 감사인가!’라는 제하의 비판성 대서특필이 난무했다. 참으로 난처했다. 그 무렵 건국대로 인한 더 고통스러운 사건이 또 하나 터졌다. 이는 집권당 영수의 부당한 압력 때문이었다. 주무장관으로서 결코 굴복해서는 안 되는 사건이었다. 


강원도 속초·고성지구에 건국대 제3캠퍼스(동제대학)를 설립토록 만반의 준비도 되어 있고 이미 유권자에게 공약한 바도 있으니, 그리고 당정협의회에서도 합의된 바 있으니 장관은 무조건 승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안의 내용을 면밀히 살펴본즉 설립조건도 완비치 못했거니와 교육을 정치에 이용하고자 하는 저의가 간파되었다. 서울 장안동 캠퍼스의 땅을 팔아서 속초·고성 캠퍼스를 조성하다니! 결국 당시의 집권당인 민자당의 김영삼 대표, 김종호 원내총무(지금의 원내대표), 최정식 의원(속초·고성 지구당위원장)이 회동한 자리에 나를 불러 앉혀놓고 내게 본격적인 압력을 직접적으로 가했다. 순간 ‘장관직은 오늘로서 끝이구나’하는 예감이 스쳐갔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건국대 제3캠퍼스 설립안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최종적으로 ‘결재거부’ 의사를 명백히 밝혔다.(이 사건에 관해서는 <동아일보> 1998년 3월 18일자  7면에 전면기획 기사로 게재되어 있다. 「비화: 문민정부, 김영삼 정부, 정권 5년의 공과」라는 제목 하에 나와 박종철 대검찰총장(재임 6개월)과 조순 한국은행 총재를 김영삼의 괘씸죄에 걸린 희생양으로 기술했다) 


그 일로 인해서 나는 많은 고통을 겪었다. 그 일이 내가 장관직을 내려놓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2년여 만에 바로 그 건국대 총장으로 오라니! 이를 어찌 내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래도 현승종 이사장은 의지를 꺾지 않고 끈기 있게 나를 설득하였다. 건국대 설립자 상허 유석창 박사(함경남도 단천군, 1900년생)의 대학 설립이념을 표현하는 상징물인 ‘황소’처럼 말이다. 그 황소는 옳다고 믿으면, 즉 성·신·의라고 믿으면 좀처럼 후퇴나 타협이 없다. 1986년의 저항운동 당시 대학 본관에 화재가 나고 농과대학장이 목매달아 죽고, 경비용 헬기가 출동하는 등의 사건이 이를 말해준다. 


더구나 현승종 이사장이 내게 총장직 수락을 강요하다시피 한 그 당시에도 건국대는 내부적으로 평안하지 않았다. 총장직은 이미 지난해부터 공석으로 되어있고 후임 총장을 경쟁하는 양대 산맥으로 학내는 갈등이 깊어져 있었다. 거기에 나보고 총장으로 오라고? 1992년에 내가 겉으로는 전국 고등학교졸업 학력고사 시험지를 도난당한 사건(전날 밤 부천 소재 서울신학교에서)으로 장관직을 인책 사임했으나 배후에는 건국대 건으로 인하여 김영삼 집권당 대표에게 괘씸죄로 찍혀 그의 살생부에 올랐던 까닭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내 사표를 수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진솔한 고백을 직접 듣고서야 알았다. 내 인생이 이처럼 건국대와 운명적으로 엮이고 있었을 줄이야!(계속)

 

윤형섭 연세대 명예교수·단국대 석좌교수

연세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했다. 연세대 교수를 거쳐 교육부 장관(1990.12.27.~1992.1.22)을 지냈다. 한국정치학회 회장과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서울신문>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으며 건국대·호남대 총장을 지냈다. 현재 연세대 명예교수와 단국대 석좌교수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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