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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의 소설
장면의 소설
  • 교수신문
  • 승인 2020.11.13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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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경 지음 | 소명출판 | 378쪽

두꺼운 소설도 때로는 한 장의 스틸 사진이나 ‘썸네일’로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그 장면으로 소설을 기억하고 떠올린다. 그것을 단편적인 기억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말이나 행동도 그의 경험과 환경에 대한 고려 없이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듯이, 소설 속 한 장면도 소설 전체의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 한 장면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소설 전체를 이해하는 것이 전제되는 작업이다. 소설은 그 장면들이 쌓여서 이루어진 의미체이기 때문이다.

미아리 셋집에 보일러 수리비를 전달하러 간 주인공이 셋집엔 들르지도 않고 빈 항아리에 똥을 누고 오는 김소진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 한강의 소설 첫 장면은 왜 광주의 슬픔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대해서, 나빠진 시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가? 왜 ‘너’를 호명하며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때 ‘너’는 누구인가?(『소년이 온다』)

소설 속 한 장면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수많은 질문들을 통과해서 얻어진다. 소설이나 사람 살아가는 일이나, 사소해 보이는 한 장면도 결코 사소하지 않고, 그 사소함에 대한 이해 없이는 한 발자국도 이해에 다가갈 수 없다. 소설 속 한 장면에서 글이 시작되는 이유이고, 소설 속 한 장면에서 시작된 글이 소설 전체에 대한 이해의 작업으로 이어지는 이유이다. 이 책은 박완서, 김승옥, 성석제, 오정희, 김훈과 한강부터 이기호, 권여선까지 우리 한국소설을 촘촘하게 수놓은 장면들을 별처럼 좇으며 하나의 장면으로부터 한 권의 책을, 그리고 한 권의 책으로부터 사람이 사는 삶자리를 그려내려는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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