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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논평-'고속철', 속도의 뒷모습
교수논평-'고속철', 속도의 뒷모습
  • 박재묵 충남대
  • 승인 2004.04.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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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묵 /충남대 사회학과 ©
고속철도가 착공 12년 만에 지난 4월 1일 개통됐다. 아직은 전용 선로가 일부 구간에만 설치돼 있어 ‘고속'의 위력을 충분히 맛볼 수는 없지만, 몇 차례 타본 경험에 비춰보면 현재의 여건 하에서도 고속철도는 분명히 ’고속‘의 장점은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 12일 오후 4시 50분에 8교시 강의를 끝내고 대전역까지 자동차로 달려가 5시 39분 고속철을 탔다. 서울역에 도착해서 시계를 보지는 않았지만, 도착 예정 시간인 6시 38분을 제대로 지킨 것 같다. 긴 승강장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마포에 있는 모 신문사에 도착해서 시계를 보니, 6시 50분쯤 되었기 때문이다.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7시에 시작되는 회의에 제때 도착할 자신이 없었지만, ‘고속’철 덕분으로 지각하는 지방 사람이라는 딱지는 겨우 면할 수 있었다. 종전의 1시간 32분을 49분으로 단축시킨 고속철도의 편익이 극대화된 사례이다.

 

그러나 고속철도가 이처럼 밝은 얼굴만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선 ‘고속’의 위력 때문에 발생하는 불편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승객이 기대하는 쾌적성의 일부는 ‘고속’과 맞바꾸어졌다고 할 수 있다. ‘고속’을 내기 위해 차폭을 좁힘으로서 좌석이 편안치 못하고, 유난히 많은 터널 속에서는 불쾌감을 주는 진동과 소리를 참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고속’ 때문에 역방향 좌석을 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역방향으로 앉은 승객들은 ‘고속’ 때문에 어지러움을 겪고 있다. 승객뿐만 아니라 고속철도 주변에 사는 주민들도 ‘고속’ 때문에 소음 공해를 감수해야 한다. 소음 공해를 줄이기 위해 방음벽을 설치하게 되면 이번에는 승객들의 전망이 형편없이 망가진다.

 

고속철도의 명암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고속철도의 개통이 주변 지역에 미치는 사회경제적 영향은 체계적으로 검토해 봐야 할 문제이다. 철도청 홍보물에 나와 있듯이, 고속철도의 개통은 전국을 ‘반나절 생활권’으로 묶어주기 때문에 주변의 많은 지역들이 지역발전의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원거리 출퇴근이 가능해짐에 따라 일부 지방도시들은 새로운 거주지로 부상될 가능성이 있고, 일부 지방도시에는 수도권의 기관과 산업체들이 이주해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 천안과 아산은 이러한 두 가지 변화가 모두 기대될 수 있는 지역이다. 

 

그러나 ‘고속’과 그로 인한 ‘시간 단축’의 효과가 지역간에 고르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앞에서 언급한 천안과 아산에서 기대되고 있는 지역발전 효과가 다른 지역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지역발전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고, 거꾸로 저발전을 겪지 않을까 우려되는 지역도 없지 않을 것이다. 과거 고속도로의 개통 시에도 지방 도시의 일부는 인구의 감소를 겪은 바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극단적인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적어도 많은 지방도시의 일부 기능은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예를 들어 이동에 소요되는 시간이 단축됨에 따라 지방도시 중산층의 소비 및 여가 활동이 서울로 집중됨으로써 지방도시의 유통업과 문화산업은 오히려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 결국 고속철도의 개통으로 도시간 위계서열과 종주성(宗主性)이 과거보다 더 강화될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이다.

 

고속철도의 개통으로 인한 지역간 양극화 효과를 줄여서 전국이 골고루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부가 고속철도가 미치는 사회경제적 영향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형 국책사업의 경우, 예비타당성조사와 환경영향평가와 같은 법적 평가 절차가 마련돼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평가에서 사회적 영향의 측면은 대체로 소홀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적어도 고속철도 건설과 같은 대형 국책사업의 경우에는 이미 선진국에서 활용하고 있는 사회영향평가(social impact assessment)제도가 도입될 필요가 있다. 현재 경부고속철도 천성산•금정산 구간 건설을 둘러싸고 진행되고 있는 사회적 갈등도 사업이 가져올 사회적 영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데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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