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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실의 근친혼 이야기
프랑스 왕실의 근친혼 이야기
  • 교수신문
  • 승인 2020.11.04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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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섭 지음 | 푸른역사 | 336쪽

‘근친혼’은 금기어다. 한국도 한때 동성동본 간 결혼까지 금지했을 정도다. 하지만 근대 이전 유럽 왕가에서는 근친혼이 흔한 일이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유럽 왕실의 할머니’로 자리매김 되어 있고, 현재의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노르웨이 국왕 하랄드 5세가 6촌 간이라는 사실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저자는 근친혼의 역사적, 정치적 배경과 사례를 짚어내어 근친혼을 정식으로 역사의 무대에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에 따르면 근친혼은 가문의 재산을 보호하는 재산을 보호하는 좋은 방법으로 유럽 왕실에서는 삼촌과 조카의 혼인도 흔했다(34쪽). 여기에 교회는 ‘상속 재산’의 귀속을 노려 근친혼을 금지했지만 실제는 유명무실했다고 한다.

역사는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뿌리 깊지만 숨겨진 동기와 배경이 작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국왕이 국가의 정책을 좌우하는 군주국가에서는 왕들 간의 관계, 심리가 의외로 중요한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책에 나오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이 그렇다.

이 전쟁은 프랑스 남서부 지방의 귀엔 영유권 다툼이 직접 원인이었지만 그 불씨는 12세기를 살아낸 아키텐의 알리에노르란 여성이다. 그녀는 루이 7세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후 노르망디 공작 헨리 플랜태저넷과 결혼하는데 이 헨리가 뒤에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62쪽). 이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의 지도가 바뀌고 그 후손들 간에 프랑스 왕위계승권 논쟁으로 전쟁이 시작됐다. 한데 그 알리에노르는 루이 7세와 5대 조부모가 같은 근친 사이였다.

영국 의회정치의 초석을 놓은 이가 프랑스 귀족이었다는 사실은 어떤가. 1263년 헨리 3세를 꺾고 영국 최초로 의회를 소집한 시몬 드 몽포르는 왕의 누이 엘에어노르와 결혼한 시몬 드 몽포르였다. 헨리 3세의 매제가 의회파의 수장이었던 셈인데 의회를 의미하는 ‘Parliament’는 프랑스어로 ‘말하다’라는 말(파를르망Parlement)에서 나왔다.

앙리 2세와 이탈리아 출신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는 모두 10대 조부가 루이 9세, 즉 성왕 루이였으니 이 역시 근친혼이다. 카트린은 1572년 신교도를 학살하는 ‘바르톨로메오의 학살’을 주도하는데 1598년 앙리 4세는 개신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낭트칙령을 반포했다. 하지만 그의 손자인 루이 14세가 이를 폐지하면서 20만~100만 명의 위그노들이 해외로 이주한다. 산업과 경제의 주축이었던 위그노의 이탈로 프랑스의 쇠락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학자들 간의 정설이다.

근친혼의 그림자는 짙었다. 요절한 인물도 많고, 거의 4촌에 가까운 근친혼으로 태어난 발루아 왕조의 샤를 6세는 ‘광인왕’이라 불릴 정도로 정신질환을 앓았다. 이 역사책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카페 왕조 초기에 미미했던 근친혼 계수는 왕조 말기에 2퍼센트에 이르고, 발루아 왕조에서는 6퍼센트를 넘기다가, 마지막 왕조인 부르봉 왕조에서는 거의 10퍼센트에 육박한다. 왕조의 몰락이 이렇게 다가오고 있었다.”(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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