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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세계의 기억
제3세계의 기억
  • 교수신문
  • 승인 2020.11.09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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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희 지음 | 소명출판 | 458쪽

세계 전후(前後) 사회에 진입하는 해방기 이후 대한민국 지식인의 국제적인 시각과 민족주의의 인식을 제3세계 개념의 편차를 통해 상론했다. 냉전기 한국 지식사에서 세계질서의 급변을 자기화하거나 때론 타자화하는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제3세계의 용례를 추적하고 이를 통해 제국주의 이후 전개된 민족문학 담론을 ‘제3세계’를 매개로 하여 정리했다.

지정학적으로 ‘제3세계 한국’의 출현은 1943년부터 시작된 루스벨르의 신탁통치정책과 국제주의, 1947년 트루먼의 대소봉쇄와 국가주의 등 전후의 미국 대외정책에 입각하여 이해될 여지가 있다. 해방기에 급증했던 세계평화론과 약소민족 담론은 이 시기 미소 양극체제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 제1부 「탈식민의 상상 이후 자유아시아와 제3세계」는 해방기, 1950년대 냉전문화에 집중해 개별 문학자, 문학단체의 전후 인식이 제3세계적 범주 속에서 구축 또는 전이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제2부, 제3부에서는 민족-세계의 관계 속에서 등장한 문학 담론에 주목한다. 1970년대 말 문학자들은 제3세계문학론을 통해 탈서구적인 역사 인식과 세계사의 인간적 발전을 민족문학의 선결 과제로 내세웠다. 이를 본격적으로 다룬 지면이 제3부 「제3세계문학의 수용과 전유」이다.

제3세계에 대한 이 책의 관점은 민족문학의 전망을 냉전체제라는 단절된 사상과 감정 속에 편입시켜 후진성을 내면화한 해방 후 문인들에 주목하는 데 있다. 해방을 세계사적 전환기로, 한국전쟁을 세계대전으로 거침없이 명명하던 논자들은 세계/한국의 전후 담론 속에서 승전국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대해 비판적으로 반응하면서도 새로운 세계성에 의해 가시화된 후진성을 자신의 한계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정치의 급변을 분석할 때나 외국문학자와 직접 교류하고 서구문화를 번역, 수용할 때도 이들은 민족의 보편성을 심도 있게 재성찰하기 이전에 식민지, 아시아, 분단 등을 범주로 후진성 담론을 재생산했다. 제3세계론은 냉전의 정치적 산물 및 대타의식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등의 전방위적으로 후진성을 자각하고 위기의식에 대응해나가는 과정의 일부였다고 할 수 있다.

비동맹적 중립의 탈식민적 이념과 이상을 제3세계의 개념으로 이해해보면 비평과 문학에 등장하는 제3세계란 미국 주도의 냉전문화에 반응하는 다양한 수사적 형식처럼 읽혀진다. 자유, 민족, 세계, 민중, 평화 등의 탈식민적 가치가 냉전체제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바탕으로 재조정되는 것이다. 바꿔 말해 탈서구, 탈식민, 탈냉전의 문제의식이 민족문학론으로 표출되는 과정에서 광의의 제3세계의 개념은 지속적으로 참조됐다. 더욱이 박인환, 김수영, 백낙청, 김지하, 최원식 등처럼 제3계적 시각이 아메리카니즘으로 소비되거나 자유주의, 민족주의, 민중주의, 근본주의, 동아시아의 이념으로 해명되는 사례에 주목해볼 때 한국 지성사에서 제3세계론은 간과하기 어렵다.

새로운 세계사의 전망이 요청될 시기에 등장한 제3세계라는 용어가 이제 시효를 다했다고 하더라도 그 이념의 정치적, 진보적 의의는 여전히 기억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냉전기 한국 지식사에서 세계성, 후진성 인식의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제3세계는 여전히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고, 적어도 한국문학에서는 기념비적인 학술용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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