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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혁명, 쉽진 않아도 늘 흥미로운 투쟁 역사
성 혁명, 쉽진 않아도 늘 흥미로운 투쟁 역사
  • 장혜승 기자
  • 승인 2020.11.06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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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성 정치학
케이트 밀렛 지음 | 김유경 옮김 | 쌤앤파커스 | 736쪽

“딸만 낳아서 죄송합니다.”

내가 태어난 1990년은 116.5:100이라는 최악의 성비를 기록한 해였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나서 엄마는 ‘또’ 딸을 낳았고 막 동생을 낳은 엄마 옆에서 외할머니가 마치 죄인처럼 친할머니에게 했다는 말을 엄마는 30년이 지나서도 어제 일처럼 말하곤 했다.  

미국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을 최전선에서 이끈 저자 케이트 밀렛이 “성 혁명의 전투장은 인간 제도라기보다 의식”이라고 설파한 것처럼 가부장제는 철학, 정치, 종교 등 제도는 물론 인간 의식에 뿌리깊이 박혀 있다. 특히 가부장제의 피해자이자 피지배자인 여성마저도 완벽하게 가부장제에 순응하게 한다는 점에서 가부장제는 독보적이다. 저자도 "순응이라는 문제에 가부장제는 비길 데 없이 뛰어난 지배 이데올로기이다. 가부장제가 아닌 다른 어떤 체계도 그렇게 완벽하게 피지배자를 지배하지는 못했을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저자 케이트 밀렛. 출처=쌤앤파커스
저자 케이트 밀렛. 출처=쌤앤파커스

투계장에서 여성 침실의 정치학으로
이 책은 ‘정치’를 정당을 중심으로 한 협소한 개념으로 보지 않고 “권력으로 구조화된 관계와 배치”로 정의해 가부장제에서 성(性)이 지니고 있는 정치적 함의를 분석했다. 이를 통해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의 이론적, 철학적 토대를 다양한 사례와 이론으로 제시할 수 있었다.

미국 소설가 헨리 밀러의 유명한 소설 「섹서스」에서 주인공이 친구의 아내를 유혹해 성관계를 갖는 장면을 통해 작가가 성적으로 고분고분하지 못한 여성들은 ‘얻어맞아야’ 한다는 지배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저자는 날카롭게 읽어낸다. 저자는 이를 통해 “밀러의 모티프는 여성 침실의 정치학이기보다는 투계장(鬪鷄場)의 정치학에 더 가깝다”고 진단하며, 때로 후자는 전자를 해명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고 말한다.

가부장제 정당성 입증에 동원된 과학
2부에서 저자는 성혁명 제1기(1830~1930)와 성 혁명 반동기(1930~1960)의 특징을 세밀하게 들여다봄으로써 제1물결 페미니즘 운동 과정과 반동기를 소개한다. 이 시기 결혼이 봉건제와유사하다는 지적은 현재 대한민국 사회가 겪고 있는 초저출산 현상의 보다 근본적 원인이 가부장제와 밀접하게 결합된 결혼 제도임을 돌아보게 한다. 특히 “여성이 자신의 농노 신분에 의심을 품지 않게 하기 위해 결혼식은 복종과 순종에 대한 명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서 “이는 경건한 신자(여성은 경건이라는 약물을 과다 복용해야 했다)에게는 단순한 세속적 명령보다 더 강력한 명령이었다”는 일갈은 결혼 제도의 속성을 낱낱이 해부해서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제1물결 페미니즘 운동이 이뤄낸 대표적 성과를 여성 참정권 쟁취라고 분석하며 여성으로부터 도전을 받은 가부장제가 "과학이라는 최신식 언어"를 동원해 전통적인 성 역할을 정당화하고 여성의 열등함을 증명해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특히 ‘남근 선망 이론’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동원한 프로이트가 이러한 과학적 선동 작업에 앞장섰다고 비판한다. 프로이트가 가부장제의 정당성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데 열을 올렸던 이유는 “사회의 안전과 전통적 결혼의 힘은 여성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데 달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3부 ‘문학적 고찰’에서는 대표적인 반 페미니즘 작가 3인(D. H. 로렌스, 헨리 밀러, 노먼 메일러)의 작품에 ‘남성적 유머’로 포장돼 내재된 여성혐오를 낱낱이 파헤친다. 헨리 밀러의 제자 컬리가 한 여성에게 모욕을 가하는 이유를 단순히 그녀가 단지 ‘음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수치스럽게도 인식하지 못하고 부당하게 야심에 차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장면이 단적인 예이다. 

이렇듯 인류의 태곳적부터 함께한 가부장제이지만 현재 가부장제는 전 세계적으로 ‘곤경에 빠져’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끊임없이 페미니즘을 훼방하고 이슬람 근본주의는 정치적 프로그램 전체를 여성의 새로운 예속 위에 건설하고 있다. 저자가 말한 대로 가부장제의 오랜 역사는 가부장제의 거대한 동력이며, 허울뿐인 영속성을 보증해준다. 

그렇다면 성 혁명을 완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성 혁명은 전통적으로 혁명이라는 용어에 함축된 정치적·경제적 개혁을 수반해야 하지만 필연적으로 그러한 개혁을 훨씬 더 뛰어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개혁이 내포하고 있는 심오한 변화란 과장된 무장 투쟁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성숙과 진정한 재교육으로 완수된다. 

그래서 우리는 저자가 말한 대로 여성 해방이 장기간에 걸친 가장 오래된 투쟁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다 해도 저자가 말한 대로 제2의 성 혁명 물결은 마침내 인류의 절반을 태곳적부터 계속되어온 예속에서 해방하려는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 투쟁이 쉽지는 않아도 늘 흥미롭다는 것도 알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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