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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색하는 삶’ 한용운, 식민지와 서구 근대를 넘다
‘모색하는 삶’ 한용운, 식민지와 서구 근대를 넘다
  • 김재호
  • 승인 2020.10.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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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 이선이 경희대 교수
근대 문화지형과 만해 한용운 | 소명출판 | 415쪽

정말 오랜만에 깊이 있는 학술서를 만났다. 바로 이선이 경희대 교수(한국어학과)의 『근대 문화지형과 만해 한용운』이다. ‘만해 한용운’하면 3.1 독립선언과 「님의 침묵」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한용운이 일제 식민지 하에서 얼마나 많은 사상적 고민과 풍랑에 휩싸였는지 알 수 있다. 그 역시 한 인간이었으며, 역사 속에서 번민하는 작은 점이었다. 이선이 교수는 책에서 “한용운을 충돌하는 이념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의 길을 모색하며, 자기시대를 치열하게 살아낸 한 사람의 인간으로 다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적었다. 지난 20일 이선이 교수를 인터뷰했다. 

 

이선이 교수는 만해 한용운을 통해 근대의 문화지형을 살펴보았다.

 


‘만해 한용운’이 2020년 한국사회에서 유의미한 지점은 무엇일까? 이 교수는 한 마디로 ‘모색하는 삶’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불교근대화운동을 주도하면서도 3·1운동 참가로 감옥체험을 했고, 대립하는 좌우세력을 결집하여 민족을 대표하는 단체를 만들고자 신간회를 결성하는 등 그의 삶은 지속적으로 의미를 찾아나가는 모색의 과정이었다”며 “오늘날 우리의 삶이 정해진 궤도 안에서 벗어나기를 두려워하면서 기계적인 효율성에 집착하는 쇄말주의로 치닫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보면, 한용운의 생애는 삶이 얼마나 치열한 모색을 통해 자기를 넓혀나가는 가능성의 장인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한용운은 충남 홍성에서 백담사, 블라디보스토크와 도쿄, 만주로 이동하면서 삶의 가치를 찾아나가려고 했다. 


특히 이 교수는 “한용운을 통해 우리는 서구중심의 지적 풍토가 견고하게 자리 잡은 오늘날의 학문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재인식해 볼 수 있다”며 “신구(新舊)와 동서(東西)가 만나며 급변하는 역사적 전환기에 변화하는 세계상을 적극 수용하면서도 우리의 전통이 함장하고 있는 가치 있는 사상적 자산을 현재화하여, 이 둘을 대화적 관계 속에 놓고 사유하는 열린 태도는 지금의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시각과 자세가 아닌가 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그는 “한용운의 방황과 모색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으면서 ‘비타협민족주의자 한용운’이라고 확정하는 방식으로는 그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보았다”면서 “상황과 인간, 맥락과 삶의 접붙이기를 통해 우리사회의 극단적인 대결구도를 넘어서고자 했다”고 답했다. 여전히 친일과 항일이라는 이분법에 갇혀 있는 진영 논리에 거리를 두고자 한 것이다. 

 

 

 

급변하는 역사에서 전통을 현재화

 

책을 보면, 한용운은 철학, 문학, 종교, 역사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저술했다. 그 배경 혹은 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한편, 한용운의 근대인식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그 이유가 다방면의 관심과 저술 때문이 아닐까? 이 교수는 한용운이 한학으로 동양 고전을 익혔고, 불교에 귀의한 후 서양학문에 눈을 떴다고 설명했다. 서구의 근대학문을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가 부족했고, 독학으로 서양을 공부했다. 다만, 한용운은 서구적인 근대에 흡수되지 않고 동·서양의 접점을 모색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 교수는 “그는 선사와 시인과 실천적 지식인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기시대를 살아낸 인물”이라며 “근본적인 동인은 그가 격변하는 시대와 적극적으로 호흡하며 삶을 모색해나간 인물이라는 데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용운은 불교인으로서 조선조의 억불정책에서 벗어나 종교적 입지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래서 일본 유학을 다녀와 조선불교유신론(1913)을 집필했다. 한용운은 만주행에서 독립의 열기를 확인했고, 3·1운동 이후의 감옥 체험으로 민족 현실을 글로 썼다. 이 모든 것은 자기수양 혹은 자기성찰과 함께 해 님의 침묵으로 탄생했다. 

 

이 교수는 한용운 전집에 오류가 많은 이유에 대해 시대적 한계라고 설명했다. 사후 30년이다 된 시점에 전집이 나왔고, 방대한 작업을 여러 사람들이 함께 하면서 오류가 발생했던 셈이다. 또한 한용운을 포함한 근대 지식인들이 필명을 다양하게 썼기 때문에 모든 글들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한용운 관련 축제나 예술제들 개최도 중요하지만, 그에 대한 기초적인 자료를 정리하고 바로잡는 일이 급선무라고 이 교수는 강조했다.

 

한용운이 친일에 가담한 부분이 있나

 

『근대 문화지형과 만해 한용운』을 보면, 친일행적으로 비판받고 있는 김동환이 주도한 잡지 삼천리에 한용운이 글을 자주 썼다는 사실, 1941년 8월에 대동아전쟁의 지지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마련된 임전대책협의회에 참석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또한 친일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선학원에서 십 년을 기거하며 지속적으로 관여했다는 것도 그렇다. 한용운에 대해 이러한 부분은 잘 안 알려져 있다. 책에서 이 교수는 선학원의 친일 혐의에 대해 다른 상상이 가능하다는 내용을 수록했다. 이 교수는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화산도를 쓴 재일조선인 작가 김석범 선생이 쓴 1945년 여름이라는 소설과 그의 증언록을 보면 다른 상상이 가능하다. 일제 말기, 선학원은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었다. 선학원은 분명 중일전쟁 이후 일제에 협력했다. 이러한 충돌 지점에 한용운의 생애 역시 자리한다.  

이 교수는 “일제 말기의 선학원에 대한 평가나 한용운의 행적에 대한 평가는 무관한 것 같지만 사실은 분단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한 반공이데올로기와 그로 인해 강화된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와 모두 연관되어 있다”며 “선학원에서 민족독립을 준비했던 세력이 여운형 계열이었는데, 이런 연유로 이 부분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덧붙여, 이 교수는 “한용운을 비타협민족주의라는 범주에 넣고만 인식하고자 했기 때문에 ‘임전대책협의회’ 참석 같은 것은 간과되어 버리지 않았나 싶다.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지점이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한용운의 낙관적인 근대인식의 결과가 「님의 침묵」(1926)으로 나아갔다고 해석했다. 식민지 조선이, 전근대, 근대, 탈근대가 동시적으로 공존하면서 한용운이 식민지 근대성에 갇혔던 것은 아닐까? 이 교수는 “한용운의 세계인식에는 그 근저에 자연의 운행원리인 순환적 세계관이 놓여 있다”며 “그는 당시 동아시아인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계절의 순환을 삶의 원리로 삼는 데 친숙했고, 여기에 불교의 연기사상까지 더해지면서 순환의 관점에서 세계의 변화를 포착했다”고 답했다. 한용운은 서구의 사회진화론이나 역사의 발전사관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그 예가 바로 「님의 침묵」이다. 이 교수는 “이별이 곧 만남이 되는 것, 타다 남은 재가 기름이 되는 것은 모두 순환성에 대한 믿음의 표출”이라며 “낙관적 세계인식은 여기에서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고, 그의 사상에 전근대, 근대, 탈근대가 공존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세계인식 방법과 연관시켜 생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한용운이 식민지 근대성에 갇혀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교수는 “식민지 근대성은 식민지근대화론과는 다르게 비판적으로 근대를 인식하는 입장이므로 갇힘이라기보다는 열림이라고 해야겠다”며 “낙관적 세계인식이 식민지현실에 대한 비판과 어떻게 연관되는가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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