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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 음악문화
조선왕실의 음악문화
  • 이혜인
  • 승인 2020.10.23 13: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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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 의레와 문화 (전11권) 시리즈 완간!
저자 송지원 | 세창출판사 | 383쪽

조선은 유교적 이상국가를 지향하여 예악정치를 표방하였다

조선왕실이 표방하고 구현해 낸 음악문화의 전반적 양상을 밝히는 일은 조선왕실의 예법적 질서를 이해하고 나아가 왕실문화의 핵심을 이해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조선왕실에서 시행된 오례는 단순히 ‘왕실의 일회성 행사’라는 의미에 국한되지 않으며 오례 각각에서 연행된 각종 의례와 음악은 단순히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닌, 조선시대를 일관하는 예법질서의 외부적 구현태로서의 의례와 음악이라는 다층적 의미가 있다. 그들이 지향하고자 하는 ‘예법질서의 이상적 모습’이 왕실음악에 담겨 있으므로 이번 기회에 조선왕실에서 연행된 왕실 음악문화의 총체적 모습을 진단해 보고자 하였고 이는 나아가 유교 음악문화의 운용 방식과 의미 및 그 내용을 살펴본다는 의미도 함께 지니게 된다.
이러한 조선왕실의 의례와 음악 연구에는 공시적·통시적 고찰이 필수적이다. 그 음악이 연행되는 문화의 실체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악정치의 이념하에 행해졌던 오례에 대해 상세히 파악해야 한다. 따라서 이 책은 조선왕실의 음악이 운영되고 소통되는 양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데에 중점을 두어 연구해 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 ‘조선왕실의 유교정치와 음악’, ‘조선왕실의 공연과 악기 제작’, ‘조선왕실의 예악서 편찬’, ‘조선왕실의 음악 담론’, ‘조선왕실의 음악기관’의 다섯 분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더욱이 이 책은 11권으로 기획된 ‘조선왕실의 의례와 문화’ 시리즈를 마감하는 책이기도 하다.
  


차 례

머리말

제1장 조선왕실의 유교정치와 음악
1 조선 초 오례(五禮)의 정립과 왕실음악
    1) 선초 오례의 정립
    2) 건국 초반 왕실음악의 정비 양상
    3) 오례의 정착과 예악
2 오례에서 용악(用樂)의 양상
    1) 보본반시(報本反始)의 길례음악
    2)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연향음악
    3) 균일절제(均一節制)의 군례음악
    4) 진이부작(陳而不作)의 흉례음악
3 왕실음악의 유교적 특징
    1) 음의 높이에 부여된 유교적 질서
    2) 악대와 일무를 통해 구현된 삼재사상
    3) 제례악기에 드러나는 유교적 상징

제2장 조선왕실의 공연과 악기 제작
1 조선왕실의 춤과 음악
    1) 조선왕실에서 연행된 춤과 음악
    2) 『악학궤범』에 보이는 정재와 음악
    3) 『정재무도홀기』를 통해 본 정재와 음악
2 조선왕실의 공연 공간과 음악
    1) 전과 당에서 행해지는 의례
    2) 묘와 단의 의례
    3) 문의 의례
3 왕실악기의 제작
    1) 왕실악기의 제작 사유
    2) 연향과 제례를 위한 악기 제작
    3) 궁궐의 화재와 악기 제작
    4) 새로운 의례를 위한 악기 제작
4 왕실악기의 제작 기록
    1) 인조 대의 『제기악기도감의궤』
    2) 영조 대의 『인정전악기조성청의궤』
    3) 정조 대의 『경모궁악기조성청의궤』
    4) 순조 대의 『사직악기조성청의궤』

제3장 조선왕실의 예악서 편찬
1 조선왕실의 악학: 음악지식의 집성
    1) 『동국문헌비고』 「악고」 편찬 경위와 기술 방식
    2) 「악고」의 구성과 음악 분류 방식
    3) 「악고」와 『악학궤범』의 음악지식 집성 방식
    4) 편찬자 서명응의 시각
2 악서 제작의 실상
    1) 왕실행사의 기록, 오례서
    2) 왕실행사와 의궤
    3) 왕실의례의 노랫말 모음, 악장모음집
    4) 악학 부흥을 위한 악서

제4장 조선왕실의 음악 담론
1 예와 악의 담론
2 아악과 속악 논의
    1) 세종의 아악 정비
    2) 영조 대 아악 부흥 노력
    3) 속악을 향한 세종의 노력
3 악장 논의

<b>제5장 조선왕실의 음악기관</b>
1 장악원 이전의 음악기관
    1) 아악서와 전악서
    2) 장악서와 악학도감
2 조선시대 궁중음악의 총본산, 장악원
    1) 장악원 소속 음악인의 연습과 시험
    2) 궁중음악 연주자들, 악공과 악생
    3) 궁중의 춤과 반주음악 담당자들, 무동과 여기, 관현맹인
    4) 장악원 제조와 전악의 임무
    5) 장악원 관리와 음악인

부록 조선시대 주요 의례를 위한 음악의 악기 편성 일람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 소개

송 지 원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음악학 전공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비전임교수로 강의하고 있으며 국악방송에서 〈국악산책〉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공연문화학회 명예회장이다.
조선시대의 음악사상사, 음악문화사, 음악사회사 분야의 연구를 통해 인간과 문화, 사회, 사상의 관점에서 조선시대를 읽어 내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 공연예술 및 축제와 의례에 대한 관심도 크다.
2002년 제3회 이혜구 학술상과 2013년 제17회 난계악학대상을 수상했다. 한국공연문화학회 회장과 문화체육관광부 국립국악원의 국악연구실장,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책임연구원 및 연구교수 등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정조의 음악정책』, 『한국음악의 거장들』, 『조선의 오케스트라, 우주의 선율을 연주하다』, 『음악, 삶의 역사를 만나다』(공저), 『새로 쓰는 예술사』(공저) 등이 있다.
-편집자의 말

조선왕실의 음악문화, 조선을 말하다

음악과 정치와의 밀접성을 이야기한다면, 아마 요즘의 세대들은 별로 공감치 못할 것이다. 현재 우리가 즐기는 음악에는 어떤 정치적 맥락도 없고, 음률만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민주화 시대를 살아온 이들이라면, 음악이 어떠한 힘을 가지고 있고 왜 때로는 금지됐었는지 아주 잘 알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가 자유롭게 음악을 즐기는 것조차도 일종의 정치적 맥락인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듣는 음악이 우리의 사회를 반영한다는 것은 누구나가 동의할 사실일 것이다. 이러할진대 예와 악의 나라인 조선에서 음악이 가지는 중요성은 실로 지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악이 우리가 현재 주로 쓰는 좁은 의미의 악이 아니라 악가무를 아우르는 넓은 의미의 악이라면 더 말할 것조차 없다. 이러한 실정에도 ‘조선왕실의 음악문화’에 관한 논의는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졌었다. 최근에 들어와 차츰 음악사상사적·문화사적·사회사적 접근으로 가기 위한 노력들로 시야가 확대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는 매우 아쉬운 현실일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왕실의 음악문화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이 책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조선왕실의 음악문화를 넘어서 조선의 새로운 측면을 우리에게 알려 주리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더욱이 이 책은 조선왕실의 의례와 문화를 연구한 여러 연구자의 연구 결과의 총집합인 “조선왕실의 의례와 문화” 총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책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책이 가지는 중요성은 아주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시대가 일어나면 반드시 한 시대의 제작이 있게 된다”

이는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이 태조에게 올린 전문에서 인용한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은 유교의 나라다. 그리고 유교는 곧 예와 악의 질서를 말하는 학문이기에, 조선은 예와 악의 나라다. 게다가 “한 시대가 일어나면 반드시 한 시대의 제작이” 있다니, 새 시대를 연 조선에게 새 음악을 제작하는 것이 중요했음은 당연지사고, 선왕의 치세를 기리는 작업이 중요했음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조선의 실정은 아주 새로이 음악을 만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어떻게 음악을 만들었을까? 또 구시대의 음악은 어떻게 즐기려 하였었을까? 이는 분명 조선의 문화와 사고를 보여 주는 중요한 요소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유교의 오경이라는 『예기』의 「악기」에는 “치세(治世)의 음은 편안하고 즐거우며, 망국(亡國)의 음은 슬프고 시름겨우니 백성들이 곤궁하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러므로 조선의 군왕들은 자신의 치세에 예악을 정비하는 일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예악의 어지러움은 곧 통치의 어지러움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군왕의 자질과 직결하는 문제였다. 또 이처럼 음악이 가지는 중요성이 중대했으므로, 이를 연주하는 악기에 관해서도 깊은 관심이 필요했다. 따라서 새로 악기를 제작할 때는 아주 엄중한 절차와 기준을 바탕으로 제작할 수밖에 없었으며, 때로는 중국에 가서 배워 오기도 할 정도였다. 연주자의 숙련도가 중요했음은 구태여 언급하지 않아도 자명할 것이다.


예악정치를 구현한 조선, 그 정비와 기록

조선에 호감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불리는 별칭이 있다. 바로 “기록덕후”라는 말이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 관찬 기록뿐만 아니라 수많은 기록을 남겨 우리가 그 시대를 살펴볼 수 있도록 한 데에 대한 찬사인 셈이다. 특히 이러한 평가는 태종의 낙마 사건이나 영조의 게장과 관련된 이야기와 함께 자주 언급되고는 한다. 그러한 ‘기록덕후’ 조선이 예와 악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리는 없다. 아니, 그보다 애시당초 이처럼 조선왕실의 음악문화를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것부터가 조선의 기록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은 물론 예와 악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악기를 제작할 때는 의궤를 남겼고, 행사를 연행할 때도 기록을 남겼다. 여기에 더해 당대의 음악에 관한 논의 역시도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이 모든 기록은 모두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였다. 
“좋은 음악도 귀를 스쳐 지나가면 곧 없어지고, 없어지면 흔적이 없는 것이 마치 그림자가 형체가 있으면 모이고, 형체가 없어지면 흩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악보가 있으면 음의 느리고 빠른 것을 알 수 있고, 그림이 있으면 악기의 형상을 분변할 수 있고, 책이 있으면 시행하는 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신들이 졸렬한데도 불구하고 이 책을 찬한 이유이다”라는 『악학궤범』의 문장은 조선이 어떠한 생각으로 이러한 기록을 남겼는지 잘 보여 준다. 그리고 이 책 역시도, 이러한 조선왕실의 음악문화가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또 어떠했는지 등 조선왕실의 음악문화에 대한 총체적 연구를 “전하기 위해” 쓰인 것이다. 언제나 기록을 살피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기록이 언제나 “전하기 위해서” 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책 속에서

태종 대에는 의례상정소를 중심으로 조선왕실의 음악을 새롭게 제정하여 써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 음악이란 예악정치의 핵심 가운데 하나이며 정사(政事)를 알 수 있도록 하는 지표와 같은데 당시의 음악은 삼국시대 말기의 음악을 이어받은 고려조의 음악을 그대로 쓰고 있으므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25쪽

왕실의 연향은 ‘백성들과 함께 더불어 즐긴다’라는 여민동락의 정신에 기반하여 베풀어진다. 연향은 오례 중의 가례와 빈례에 속하여 행해졌는데, 왕이나 왕비의 생신, 세자의 탄생, 왕의 즉위 기념, 책봉, 존호(尊號), 양로연(養老宴), 음복연(飮福宴), 정월 초하루나 동짓날, 단오와 추석 등을 위한 의례는 가례로 행해졌고 외국 사신의 영접과 그들을 위한 연향은 빈례로 행해졌다. 42쪽

제례에서 연행되는 일무는 그 기거동작의 의미가 고도의 상징체계를 가지고 설명된다. 물론 그 상징체계는 유가 예악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유가적 설명체계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제례의식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악대의 위치라든지 악기의 위치와 색깔, 일무를 추는 무원의 숫자와 위치, 춤추는 동작의 의미 등은 유가 예악론 안에서 하나의 소우주처럼 질서정연하게 설명된다. 75쪽

조선왕실의 춤과 음악은 각종 의례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예와 악의 외부적 구현태로 드러났다. 따라서 왕실의 의례에서 연행되는 춤과 음악도 일정한 기준에 맞는 것이 아니면 안 되었다. 건국 초반에 왕실의 의례를 행할 때 쓰일 음악이 어떠한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해 예조를 중심으로 다양한 논의가 오고 갔던 것이 그러한 정황을 잘 알려 준다. 91쪽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여러 의례들이 왕실의 행사로서 연행되었지만 지금 이 시대의 시각으로 본다면 모두 중요한 공연 작품이기도 하다. 다양한 방식의 공연예술 작품이 궁궐의 각 공간에서 다양하게 연행되었다는 시각으로 볼 수 있다. … 이처럼 궁궐의 여러 공간은 ‘공연 공간’이라는 의미가 이미 부여되어 있었다. 127쪽

악기는 예와 악이 아울러 수행되는 의례의 온전한 형식과 내용을 갖추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도구이다. 따라서 궁중의 주요한 의식 절차 과정에서 악이 빠지면 예가 흠결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악을 제대로 연주하려면 해당 음악 연주에 필요한 악기의 틀을 모두 갖추어 놓아야 했다. 151쪽 

조선왕실은 조선 전 시기를 통해 음악지식 집성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 결과는 전문 악서 및 악보는 물론 각종 의궤, 법전 등에 집중적으로 혹은 산발적으로 정리되었고 그 성과가 시기별로 집적되기에 이르렀다. … 특히 「악고」의 완성은 그 이전 시기의 성과에 비해 대규모 음악지식 집성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7쪽

즉, 귀를 스쳐 지나간 후에는 없어진다는 음악의 특수성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악학궤범』에는 당시 사용하고 있는 음악, 악기, 복식을 비롯하여 역사적으로 중요한 음악 내용을 모두 기록하였다. … 여기에는 당시의 악·가·무에 대한 정보가 총체적으로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악기, 음악제도, 복식, 악현 등에 이르기까지 섭렵하고 있어 궁중음악 기록의 모범이 된다. 238~239쪽 


음이란 인심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정이 마음속에서 움직여 성으로 나타나고, 그 성이 질서를 이루어 음을 만든다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잘 다스려지는 나라, 어지러운 나라, 망해 가는 나라의 음악이 동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치세의 음은 편안하면서 즐거우니 그 정치가 화평하기 때문이다”라는「 악기」의 설명은 아마도 모든 통치자에게 결코 쉽게 넘길 수 있는 대목은 아닐 것이다. 그 시대에 연행되고 있는 음악이 자신의 통치상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250쪽 

세종은 지극한 사랑으로 만백성을 기르고자 했다. 그리고 그 사랑이 후대로 영원히 이어지기를 원했다. 그 마음을 회례악무 〈보태평〉·〈정대업〉에 고스란히 담은 것이다. 세종이 만든 이 음악은 1464년(세조 10)에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되어 지금도 매해 5월이면 종묘에서 들을 수 있다. 백성과 더불어 즐기고자 하는 세종의 마음이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있다. 
270쪽 
 
예와 악에 대한 중요성은 강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악인에 대한 대우는 열악했고, 악이 육예(六藝)에 포함되어 그 위상이 높았음에도 악인의 신분은 낮았던 것은 조선왕실의 음악과 음악인들의 이율배반적 존재 현실을 알려 주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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