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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생성’을 話頭로 한 예술적 흐름들
‘자생성’을 話頭로 한 예술적 흐름들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4.04.17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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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풍경은 한국적인가'

세계화 시대에 ‘자생성’이 화두가 되는 건 역설이다. 그러나 세계화로 우리 예술의 정체성이 위협받게 되자 자생성은 추구해야 할 하나의 모토가 돼버렸다. 흔히 ‘자생성’ 하면 ‘전통’, ‘한국 美’, ‘민족’ 등을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각 예술장르마다 자생성 논의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전통적인 것의 계승에서 자생성을 확보하는 분야는 연극이다. 연극 쪽에선 ‘전통연희를 어떻게 계승하는가’로 작품의 자생성이 논해지기 때문이다. 1960~70년대부터 한국적 연극이 본격화 됐는데 오태석, 윤대성, 유덕형 등이 대표 주자였다. 핵심은 서구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전통연희의 ‘놀이성’을 회복하는 것. 이상우 영남대 교수(희곡)는 “전통연희의 현대화는 지금도 중요한 흐름이다. 이는 ‘한국적인 것’에 갇힌 개념이 아니라 극장주의를 확립해 보편성까지도 확보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여타 장르들은 ‘전통에서 벗어나기’ 혹은 ‘전통의 부재’ 가운데서 자생성을 논하고 있다.  

음악 쪽에선 항상 국악이라는 전통양식이 논의의 중심에 있어왔다. 지금도 ‘국악이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활발하다. 하지만 음악평론가 전재용 씨는 “국악을 국제경쟁력 속에 위치지우는 건 어불성설이다. 세계화에 잘 편승한다고 해서 자생성을 획득했다고 할 순 없다”고 지적한다. 음악평론가 이소영 씨도 요즘 퓨전으로 현대음악과 국악을 접목시키는 시도들이 오히려 전통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며, 오히려 음악 생태론자들에게서 자생성의 가능성을 엿본다. 이 씨는 “근대의 개발?발전논리를 반성하고, 고전을 재발견하며, 생태론적 관점에서 자생성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젊은 음악가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평한다. 민족음악연구회의 일부에서 이런 움직임이 느껴진다.

건축 분야 역시 한국적 미학이 가장 쉽게 구현될 분야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세 번에 걸친 ‘한국적인 것’애 대한 논의는 소모적 대립만 가져왔다. 매번 전통양식을 계승했는가 아닌가로만 귀결됐기 때문이다. 때문에 정민영 서울시립대 교수(건축이론)는 “요즘 건축들이 자생성 운운하는 건 레토릭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지붕에 기와를 얹었다거나 흙집을 지었다고 해서 한국적인 건축이라고 할 순 없다는 것. 정 교수는 “자생성이라 하면 일단 서양의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관점이 형성됨에 따라 ‘서양 것이 아닌 것’으로 논의가 기울어진다”며, 이런 논의구도 자체가 자생성과 동떨어진 것이라 비판한다. 그렇기에 정 교수는 ‘자생성’이란 화두로 왜곡하기보다는 “우리의 동시대의 일상과 잘 융합하면서도 동시에 철학인 우리 건축을 구축해 나가는 것”이 더 자생적인 것이라 평한다.

사진은 매체 자체가 서구의 것을 수입한 것이기에 자생성을 논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러나 매체의 한계는 제쳐두고라도 ‘한국의 풍경들을 담은 것이 한국적인 사진인가’라는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흔히 우리 민족의 정서나 한국적인 소재와 풍경이 한국적인 사진이라는 건 오해다. 오히려 요즘은 서울을 비롯한 도시풍경을 담아내 한국적인 상황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닌 작품들을 자생적이라고 보는 평가들이 많다. 하지만 사진평론가 진동선 씨는 “너도 나도 도시 풍경을 찍는데, 미학적인 차별성이 거의 없다. 강운구처럼 30여 년간 끈질기게 우리 풍경에 대한 고민을 한 작가 몇몇을 제외하곤 한국적인 풍경을 찍었다라고 평가할만한 작가가 없다”고 지적한다. 특히 집단적으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게 중요한데, 배병우, 김장섭이 주도하는 ‘대동산수’라는 그룹을 제외하곤 한국 사진계에 ‘자생성’이라는 문제의식을 고유하는 그룹이 없음을 꼬집는다.

영화는 역사가 가장 짧은 장르인 만큼 어느 나라에서건 독립된 자생성의 미학을 논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렵다. 하지만 ‘우리 영화가 스스로 살아나가려면 어떤 조건들을 갖춰야 하는가’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영화에서도 자생성은 중요한 화두다. 그런데 다른 장르와 달리 예술성이 뛰어나다고 해서 영화의 자생력이 획득되는 건 아니다. 영화평론가 이상용 씨는 “예술영화들이 자생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건 메이저급 기획사들의 자본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임권택 감독도 주류에서 벗어난 소재지만, 대자본의 뒷받침으로 한국적인 작품을 만들어냈다”라며 자본과 상업성이 예술성만큼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적인’ 어떤 것을 구현해서 자생력을 획득하는 것 역시 비판적으로 본다. 예컨대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나 임권택 감독의 사극영화들이 국제무대에서 높이 평가받는 건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서구영화계에서 아시아와 제3세계의 작품들을 ‘새로운 것’이라며 높이 평가하지만 이는 단지 그들의 시각에서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경계할 필요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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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ja 2004-04-23 18:55:04
mudaeppo.com
오진철 (2004-04-22)
[re] 자생성에 관한 글-멀티플 최정화

그만큼 한국의 고유한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한국의 고유문화라니까 문화유산답사를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그건 영어로 하면 indigenous, 즉 다른 나라에는 없고 오로지 그 나라에서 본이 나와서 그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그런 독특하고 오리지널한 문화가 아니라 그냥 자생적인(spontaneous) 문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생적이라니까 또 소박한 생각, 즉 건드리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는 풀뿌리 문화를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도 아니다. 최정화가 사랑하는 빠글빠글하고 미끌미끌한 고유문화란 자생성, 고유성, 전통성, 예술성 등등 문화의 진정성을 규정해주며 생명력을 앗아가 버리는 밥맛없는 개념들의 독침을 살짝 피해 왔거나 아니면 적극적으로 피해서 다른 영토에 집을 짓고 있는 그런 것들이다.

그러니까 그것들이 그냥 거기 있는게 아니라 지식인들이나 문화의 전문가들이 규정해주고 등급을 매겨주는 그 프레임, 기준, 코드화 작용 같은 것을 적극적으로 피해왔다는 점에서 고유문화라는 것이다. 최정화가 사랑하는 고유문화는 상당히 변증법적이다. 거기 그냥 있는 것을 사랑하지만, 그것이 거기 그냥 있기 위해서는 굉장히 많은 요소들의 외침을 막아내며 버텨야 하는데, 그 외침이 하도 굳세고 끈질길 뿐더러 그것을 막아내는 힘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에 차라리 고유문화라는 타이틀을 감히 붙여 보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시장골목에서 하늘을 가리기 위해서 쓰는 타포린의 그 살벌한 시퍼런색이다. 아마 색표에서 그런 '시'퍼런색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색이 그렇게 시퍼레지기 위해서는 온갖 종류의 세련되고 맷돌질 속에 규정당하고 잘 다듬어진 그 많은 파란색들을 피해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시'퍼런색을 만든 사람이 고흐의 그림을 보면서 그 색을 연구했을리도 없고, 쪽물을 들여다가 전통적인 색을 연구 했을리고 없고, 그 모든 고유한 전통의 레퍼런스들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차라리 신경쓰지 못하고, 왜냐면 그들은 가난하고, 쉴새없이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냥 되는 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색은 화학적이고 경제적인 색이지 예술적이거나 감성적인 색이 아니다. 바로 그래서 그런 살벌한 색깔의 독특한 감각이 나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색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최정화는 철저한 국산품 애용자다.

-멀티플 최정화, 이영준의 이미지비평중에서-


오진철 (2004-04-23 00:41:53)

자생自生성이란 스스로 생존(survive)해 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지금여기 생생하고도 징그럽게 살아있는 것이겠지요.
엘리트들에 의해 획일화된 글로벌리즘시대에 충분히 이야기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겁니다. 그것을 발견해내고 그 생존역사의 결을 따라가보는 일은 우리를 돌아보기 위해서, 또 새로운 독창적 생존가능성을 모색해보기 위해서 중요합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전통의 창의적 계승이라는 지식인들의 상투적 레토릭과는 전혀 상관 없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사오정 (2004-04-23 05:18:14)

오진철님, 펌 감사합니다.(아마도 일일이 손으로 자판을 두드렸을 것 같네요) 그리고 멋찐 멘트 잘 읽었습니다.

최정화의 '멀티플'에 관한 이영준님의 해석, 참 특이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근데...

'시'퍼런색을 만든 사람이 고흐의 그림을 보면서 그 색을 연구했을리도 없고, 쪽물을 들여다가 전통적인 색을 연구 했을리고 없고, 그 모든 고유한 전통의 레퍼런스들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차라리 신경쓰지 못하고, 왜냐면 그들은 가난하고, 쉴새없이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냥 되는 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 이영준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이해하겠지만, 그 '시'퍼런색을 만든 분이 그냥 되는 대로 만들었다는 진술은 오바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모든 고유한 전통의 레퍼런스들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고 단정내릴 수 있을까요? 이영준님은 자신의 논의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너무 극단적인 판단을 내린 것으로 읽혀지네요.^^


자생성 (2004-04-23 12:37:17)

레토릭.... 레퍼런스....무신 뜻인지....

자생성논의를 하는 장에서 조차 꾸어온 개념을 빌어 애기해야하는 식민지 지식인? 들의 숙명?
논의에 필요한 자생적인 개념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쓰기위해 노력해야하지 않을까요?
아마 관심갖고 살피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오진철 (2004-04-23 14:30:50)

레토릭=수사법
레퍼런스=참고물
한국말이 따지고 보면 영어 아니면 한문이지요.


오진철 (2004-04-23 16:51:14)

사오정님 답글 감사합니다.
이영준님의 해석이 어떤 점에서 특이한지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시퍼런색에 대해서는 아마 이영준님도 사오정님이 지적하신 면을 의식해서, '차라리 신경쓰지 '못'하고'란 구절을 보충삽입한 것 같습니다. 문맥상 그 '시'퍼런색을 만든 사람은 예술과 지식의 레퍼런스에서 보호되어야 예술가인 최정화와 더 강하게 대비되니까요. 또 보통 상식적인 수준에서도 그렇게 생각되는 편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생업에 지친 시장상인들이 그 색을 '연구'해냈을리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담 왠지 더 쿨하게 보이지 않구요.


사오정 (2004-04-23 17:20:55)

이영준님의 해석이 어떤 점에서 특이한지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이영준님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자생성, 고유성, 전통성, 예술성 등등 문화의 진정성을 규정해주며 생명력을 앗아가 버리는 밥맛없는 개념들의 독침을 살짝 피해 왔거나 아니면 적극적으로 피해서 다른 영토에 집을 짓고 있다는 시각을 두고 한 말입니다.^^


사오정 (2004-04-23 17:48:59)

생업에 지친 시장상인들이 그 색을 '연구'해냈을리 없지 않겠습니까?

시장골목에서 하늘을 가리기 위해서 쓰는 타포린은 생업에 지친 시장상인이 만든 것인가요? 저는 그 타포린이 캥업에 지친 시장상인이 아닌 타포린 제작업체에서 만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타포린 제작업체는 나름대로 타포린이 설치될 장소(명품관과는 다른)를 고려하여 그 '시'퍼런 색이 착안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제작된 타포린을 생업에 종사하시는 분이 자신들의 처지(?)에 적당하다고 생각한 '시'퍼런색의 타포린을 채택한 것이 아닐까요?

여기에 타포린 제작업체와 생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의 '시장미학'이 있다고 봅니다.


오진철 (2004-04-23 18:20:34)

타포린 제작업체와 생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의 '시장미학'이 있다..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 못했군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 -;; 아트벼룩시장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