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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동향: 이반 일리히 전집 출간
출판동향: 이반 일리히 전집 출간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4.04.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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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제도화된 사회를 향한 '실증적' 사유

‘작은 것이 아름답다’, ‘오래된 미래’의 저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사회 생태학은 무엇인가’, ‘휴머니즘의 옹호’의 저자 머레이 북친은 국내에 대표적으로 알려진 생태론자들이다. 그런데 국내에서 생태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이들에 반해 ‘학교없는 사회’의 저자로 알려진 이반 일리히는 그 사상적 무게에 비해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1987년 ‘병원이 병을 만든다’가 번역된 이래 소책자 3권이 소개됐지만 그의 방대한 저서들을 다 포괄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올해부터 ‘이반 일리히 전집’(미토 刊)이 출간되면서 다시 그에 대한 관심이 일고 있다.

올해 들어 벌써 ‘학교 없는 사회’, ‘병원이 병을 만든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가 번역?출간됐다. 학교, 병원, 자동차 등이 필수가 된 근대 산업사회에 대한 일리히의 비판은 매우 구체적인 수치분석에서 시작된다. “도대체 세계 전역에 걸쳐 사람들이 최소한 15~40명의 집단을 만들어, 연간 8백~1천 1백 시간을, 4년간 받아야 한다는 아이디어는 어디서 왔는가. 이런 괴이한 학교교육이 어떻게 필수적인 게 됐을까”라거나, “전형적인 미국 남성은 자가용에 년간 1천 6백 시간 이상을 소비하고 있다. 차에서 머무르는 시간과 차를 사기 위한 계약금과 월부금 지불, 연료비, 고속도로 통행료 지불 시간을 모두 합하면 하루에 4시간은 차를 위해 소비하고 있다”라는 구체적인 자료조사로 학교교육이나 자동차 사회에 대해 비판한다.

‘학교 없는’, ‘병원 없는’, ‘자동차 없는’ 사회를 통해 일관되게 내세우는 건 ‘탈제도화’된 사회다. 그에 따르면, 사회에 어떤 기관이 생겨나 그것이 특정 단계에서 제도화가 되면 결국 비생산적이 돼 그 기관이 지닌 원래의 목적과 반대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 이런 그의 분석은 13세기 교회 설립 이후 자선단체가 제도화되면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된 것에서 시작하며, 근대의 학교교육이 사회를 여러 계급으로 분리시킨 것, 근대의 병원제도가 병의 치유와 관련없다는 사실들을 추적해가면서 제도화된 사회를 비판한다. 그의 비판의 핵심은 이것들이 “인간 삶의 가장 좋은 것들을 가장 치명적으로 망쳐놓는다"에 있다. 

그렇다고 그의 사상과 실천지침이 근대 이전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는 비판과 대안모색에서 다른 생태학자들과 구별되는 지점이 있다. 이를테면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라다크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개발 이전의 자급자족적 삶을 꾸리는데서 인간적인 삶을 발견한 것이나 머레이 북친이 과학과 기술발전에 의거해 새로운 휴머니즘을 옹호한 것과는 다르다. 즉 근대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나 추상적인 대안제시, 또는 단순히 산업체제의 불평등을 해소하자고 말하는 게 아니다. 일리히는 정치적인 관점을 갖고 구체적인 제도에 근거해 비판과 대안을 제시한다.

일례로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를 보자. 미국에서 수송수단에 사용되는 에너지의 총량이 세계 최고 45%에 이르기 때문에 대안으로 자전거를 내놓는다. 열역학, 가격, 사회문화적 비용등을 감안해서 볼 때 자전거는 인간 에너지를 이동력의 한도에 정확히 맞춘 이상적인 변환기라는 것. 하지만 이를 대안으로 택하지 못하는 건 “구성원이 참여하지 못하는 비민주적 정치과정 때문이다”라는 지적이다. 일리치는 현대문명의 ‘타율적 관리’를 넘어 ‘자율적 공생’으로 가야하는데, 이는 결국 정치과정에 달려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일리히의 사상이 국내 지식인들과 실천가들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도 곳곳에서 감지된다. 김종철 영남대 교수 주도로 녹색평론에서는 이번 달부터 ‘이반 일리히 읽기 모임’을 갖고 있다. 30여명이 매주 모이는데, 취지는 “근대 산업사회의 가치, 신념, 제도 등을 둘러싼 고정관념을 가차 없이 해부하고 인간존엄성을 옹호한 그의 저작에서 지적, 정신적 유산들을 나눠 갖고자 하는 것”이다. 환경 쪽 뿐 아니라 교육분야 던져주는 메시지도 얕지 않다. 부산대 심성보 교수(교육철학)는 “일리치 저작들이 우리 교육계의 메시지를 줄 수 있는 건 특히 문제제기 차원에서다. 제도교육의 폐해에 대한 비판들은 탈학교론에서 나올 수 있다. 특히 대안마련에 있어서는 공교육론자들과 탈학교론자들이 의미있는 대화를 형성해 공동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일리히 사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의 전집중 현재까지 번역된 건 1960년대의 저서들로 그의 사상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1980~90년대로 갈수록 그의 주 관심사는 ‘테크놀로지가 어떤 방식으로 인간관계를 황폐화시켰는가’라는 것으로 인간관계에 집중된다. 여기서 ‘歡待’라는 핵심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2005년까지 전집이 번역 완간될 예정이므로 아직까지 접하지 못한 그의 사상들을 조만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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