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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自心感 도움…성찰적 수업 곤란
학생 自心感 도움…성찰적 수업 곤란
  • 이민선 기자
  • 승인 2004.04.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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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영어강의’ 허와 실


지난 2월 어윤대 고려대 총장은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올해부터 모든 전공과목의 20% 이상을 영어로 강의하고, 2005년까지 전체 강의의 30%까지 ‘영어강의’ 수업비율을 늘리겠다고 밝혔다.

 

또 2004학년도 신입생부터 영어 강의 과목 5개 이상을 수강해야 졸업 가능하고, 새로 임용된 교원은 모든 전공을 영어로 강의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글로벌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는 이 계획은 ‘영어가 경쟁력’이라는 결연한 의지마저 보인다.

비단 고려대 뿐만이 아니다. 광주과학기술원과 한국정보통신대학(ICU)은 이미 대학 개설년도인 1995년과 1998년부터 전 강좌를 영어로 진행 중이고, 연세대는 5년 전부터 ‘영어강의’를 개설할 경우 시간당 2만3천1백원의 추가 강의료를 지급하고 있다.

 

포항공대도 2001년부터 과목당 1백만원씩의 교재개발비를 지급해 ‘영어강의’ 개설을 유도하고 있고, 한양대는 역시 과목당 70만원의 인센티브로 영어강의를 권유하고 있다.

영어에 죽고, 영어에 산다

이처럼 대학들이 ‘영어강의’ 개설에 사력을 다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영어가 세계화 시대의 생존 키워드라는 ‘당연한’ 이유 때문이다. 김영용 연세대 교수(전기전자공학부) 역시 그 같은 이유에서 ‘컴퓨터 네트워크’를 영어 수업으로 꾸렸다.

 

토플과 GRE시험 준비가 영어공부의 전부였던 김 교수에게 유학 시절 영어는 스트레스 그 자체였다. 교수가 내준 숙제가 무엇인지 알아듣지 못해 두 세 번 씩 연구실을 찾아간 것이 다반사였다. 지금 생각하면 영어만 잘했으면 생기지 않았을 일이다.

김 교수가 영어를 강조하는 건 비단 개인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건 아니다. 이미 학생들이 선망하는 기업들이 영어구사능력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ㅇ텔레콤이나 ㅅ전자의 경우 대부분 해외영업을 강조하며 1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내는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결국 공부든 취직이든 영어의사소통이 성공의 열쇠가 될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지난 학기 ‘Social Psychology'를 담당했던 윤인진 고려대 교수(사회학과)는 ’영어에 대한 자신감 획득‘을 영어강의의 최대 효과로 꼽는다. 실제로 상당수의 국내 학생들이 영어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이 있는 게 현실. 윤 교수가 같은 과목명으로 한국어로 수업할 경우에 60~70명이 수강하지만 영어로 강의했을 때는 15명 정도만이 수강했다.

 

하지만 윤 교수 강좌를 수강했던 ’순수 국내파‘ 학생들의 경우, 프리젠테이션 등의 영어발표를 통해 끊임없이 능동성을 이끌어 내자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얻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실제로 한 학생의 경우 'Social Psychology'를 들은 후 영어 대한 자신감을 얻고, 교환학생 자격으로 호주로 떠났다.

전공 관련 영어에 익숙해지는 것도 커다란 수확이다. 김영용 교수의 ‘컴퓨터 네트워크’ 수업에서 만난 어느 학생은 “어차피 전공책이 모두 영어로 돼 있기 때문에 오히려 영어강의가 편하다”라고 말하면서, “한달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영어에 익숙해지는 것 같다”라고 평가했다.

'전공 공부에 도움', '성찰없다' 이견

이는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역사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 박 아무개 씨(29세)는 “학부생 때 수강했던 영어수업이 자기 전공과 관련한 표현력을 기르고 개념을 명확히 할 수 있는데 큰 도움이 됐다”라고 말한다.

 

예컨대 한국말로 된 미셸 푸코 관련 책을 열심히 읽어도 명확하지 않았던 것들이 불어로 보는 경우 좀더 깔끔하게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영어수업을 통해 개념을 이해하고 전공 관련 표현체계를 익히는데 큰 힘이 됐다고 한다.


이러한 ‘영어강의’ 효과에도 불구하고 각 대학에서 광풍처럼 휘몰아치는 ‘영어필수론’ 목소리가 차분한 성찰작업이 빠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왕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의사소통 도구로서의 영어사용을 인정하는 입장이지만, 최근 영어강의 관련 분위기에는 영어강의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론적 성찰과정이 누락된 것 같다”라고 말한다.

김 교수에 따르면,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생각을 깊이 있게 하고 다듬을 수 있는데, 형식적이고 정해진 영어 표현으로 심도 있는 사고를 하기 쉽지 않다는 것. 자칫 영어강의로 인해 학생들이 현상을 통찰력 있게 보는 능력을 잃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김 교수는 “수식과 기호를 많이 사용하는 자연과학이나 응용과학에서는 영어강의를 해도 깊은 사고가 가능하겠지만, 말과 글을 매개로 사유하는 문학·역사·철학 같은 경우에는 상당히 어렵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사실 김 교수의 원론적인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현실적으로 ‘영어강의’를 통해 영어권 국가에서 생활했던 것과 같은 효과를 보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한국인 교수의 ‘짧은’ 영어 실력이 가장 큰 문제.

 

박사시절 5년 동안의 영어실력으로 유창한 영어 강의가 되겠는가라는 의심어린 눈초리를 보낸다. 박섭 인제대 교수(경제학과)는 “한국인 교수가 가르치게 되면 긴장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영어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면 한국말로 말하게 될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이는 ‘영어강의’를 진행하는 수업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장면. 지난 2일 ㅇ대 김 아무개 교수의 수업에서도 이같은 현상이 보였다. 김 교수의 질문 중에 ‘ambiguity'란 단어가 나와 학생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반응을 보이자, 곧바로 한국어로 친절히 설명하는 장면이 목격됐다.

ㄱ대 윤 아무개 교수 수업도 마찬가지. 윤 교수가 담당하고 있는 대학원 수업은 국내학생과 동남아시아 지역 학생이 함께 수강하는 강좌인데, 이때에도 한국어 사용은 불가피하다.

 

윤 교수는 “수업시간에 교수 자신이 말해야 하는 내용의 70% 정도 밖에 전달하지 못해, 수업시간 10분을 남긴 시점에서 우리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한국말로 해버리는 경우가 있다”라고 털어놓는다.

이렇다 보니 강의실 안에서만 통하는 영어가 생기기도 한다. ㅇ대 김 아무개 교수는 “교수도 학생도 영어에 능숙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한국어를 쓸 수 없는 상황이어서 해당 클래스에서만 서로 통하는 ‘또 다른’ 영어가 생기기도 한다”라고 고백한다.

결국 종합해보면 원론적인 이유에서든, 현실적인 이유에서든 국내 대학에서의 영어강의의 목적이 ‘영어실력의 향상’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ㄱ대 윤 아무개 교수는 “영어실력이 향상되는 것은 덤으로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강의실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것은 도구적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라고 말한다.

영어실력향상은 부수효과로 봐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각 대학에서 운영되고 있는 영어강의가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몇 가지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우선 학생들의 자발성을 무시한 채, 영어강의를 진행해서는 안된다. 영어가 필요 없거나 흥미가 없는 학생에게 영어강의를 강요한다면 수업효과가 떨어지는 건 명약관화한 일.

 

윤인진 교수의 ‘Social Psychology'의 경우, 수강생의 2/3 정도는 적극적으로 수업에 임하지만 1/3 정도는 자신감이 없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전공 선택 과목인 경우에도 이런 상황인데, 강제적으로 수강하는 영어수업이라면 효과가 반감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윤 교수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영어강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가운데, 영어강의만큼은 절대평가제를 도입해 학생의 참여도를 높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여기에 ‘좋은 교재’도 필수 조건이다. 우리말로 진행되는 수업도 마찬가지겠지만,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에서는 더욱 중요하다고 한 목소리다. 윤강준 교수는 “학생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등의 영어강의의 불충분한 점을 교재가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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