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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가거라!" 사모곡, 눈물진 두 광경
"어서 가거라!" 사모곡, 눈물진 두 광경
  • 김용준 교수
  • 승인 2004.04.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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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37

함선생님의 사모곡(思母曲)은 구구절절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나의 어머니'(전집 4: 299:305)라는 글에서 나는 함 선생님의 애절한 사모곡을 들을 수 있다.

<여자로서 보통 키였고 미끈하고 균형잡힌 체격에 침착한 몸가짐이었고 얼굴은 미인이라기보다는 맑고 점잖은 타입이었습니다. 말 적고 감정에 자기를 잃는 일 별로 없고 의지는 굳센 편이었습니다. 두뇌는 퍽 명석했던 분으로 아마 요즘 세상에 나셨다면 누구한테 뒤지지 않는 지식인이 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손재주도 좋으셔서 가난한 살림이면서도 명절 때 내 옷차림은 동무들 속에서 뛰어나서 동리 부인들이 몰려와 일부러 그 바느질 솜씨를 구경하며 감탄하던 것을 나는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명절날 밤엔 흔히 밤을 밝히면서 바느질을 했고 나도 곧잘 옆에서 지켜보곤 했습니다. 결코 남에게 떨어지는 이 아니었습니다. >

위의 글에서 나는 함 선생님의 훤칠한 키에 균형잡힌 수려한 용모에서 함 선생님의 어머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함 선생님을 아는 분들은 그의 붓글씨는 물론 색종이를 접어서 각양각색의 동물들의 모양을 만들어 내는 솜씨에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오죽하면 당신은 미술가가 됐으면 하는 꿈을 가졌었다는 글을 남겼겠는가? 함선 생님의 이와 같은 손재주는 역시 어머니한테서 이어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마흔 다섯이 되도록 시(詩)라고는 한 줄도 써본 일이 없던 내가 노래를 쓰게 된 것은 감옥 안에서 어머니 생각을 하면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시를 쓰자해서 쓴 것이 아니라 어머니 생각을 하니 자연 내 마음 자체가 애절한 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내 앞에 영원한 슬픔의 형상으로 서 계십니다.>
이렇게 애절하게 부르는 어머니 상은 '끊임없이 올라가자는' 뜻의 사람이었다는 것이고 50이 될 때까지는 글자라고는 한 자도 모르는 글자 그대로 손톱 발톱이 닳도록 일하는 농부였던 어머니가 '동경서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집 살림도 많이 늘어 움직일 수 없는 중류층이 되기도 했지만 그 보다도 놀란 것은 아버지 어머니가 기독교 신자가 되신' 사실을 함석헌은 기적과 같은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두 분이 다 그저 남 따라 무엇을 하기에는 너무도 자주적이었고 이성적인 분들이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을 함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쓰시고 있다. <아버지 어머니가 신앙에 들어가신 것은 누가 권해서가 아니라 소위 말하는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서 사람으로 마땅히 할 것을 하기 위해서 한 일입니다. 생각이 많으셨던 것을 내가 압니다.> 이렇게 기독교 신자가 되신 어머니는 <해방 직전까지 그 지방 여성계에서는 지도적인 인물이> 되셨다는 것이다. 이제는 자유와 평등사상을 내놓고는 살수가 없는 함석헌은 이와 같은 사상을 뿌리 깊이 간직하게 되는 데 그 반석을 어머니가 놓아주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7,8세의 나이 때 장남으로서의 특권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던 때였다. 채마밭에 열려있는 오이는 당연히 자기의 몫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큰 오래비 함석헌은 어느날 그 오이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는 법석을 떨었는데 결국 그 오이를 따서 먹는 사람은 5남매 중에서도 좀 못난 편인 바로 밑의 누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장자의 특권이 침범 당한 듯 야단을 피고 있었는데 평소 인자하셨던 어머니 입에서 '그건 사람 아니냐?'라는 단연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는 것이다. '그건 사람 아니냐?' 그 음성은 항상 살아 있어서 몇 번이고 부르짖었다고 함석헌은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그 어머니가 지금 어디 계실까? 1947년 2월 26일 영원한 마지막이 될 줄은 모르고 월남의 길을 나서던 날 어머니는 대문에 기대 나를 보내 주셨습니다. "내 생각은 말고 어서 가거라!" 하셨습니다. 내가 감옥에 가 있을 때 추운 겨울밤 잠은 아니 오고 견딜 수 없어 물려질만 하셨다는 어머니, 그것도 부족한 듯해 "이 추운 밤 저 애가 불도 없는 감옥에서 자니 얼마나 추울까? 나도 저처럼 견뎌보자"는 생각에 밖에 나가 밤을 세워보았다는 어머니가 자기 생각은 말고 가라니 그 가슴이 어떠했겠습니까? 나를 살리기 위해서는 자기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도 참으시겠단 말 아닙니까?
나는 어머니 생각을 하면서 어머니의 슬픔의 물레에서 끝없이 풀려 나오던 실같은 내 생각을 여기서 끊고 나도 이 시대의 아들 딸들을 향해 부릅니다. 내 생각은 말고 어서 가거라!>

함 선생님의 이와 같은 애절한 사모곡에 비하면 나의 사모곡은 어림없지만 그래도 희수에 94세의 노모를 잃은 늙은 아들의 맘속에 내 나름대로의 사모곡이 없을 수 없다.
어머니와 떨어져 사는 것이 싫어서 시골에서 당시로서는 꽤나 명예스럽게 입학했다는 경기중학교를 서울 성북동 외가에서 다니면서 주말만 되면 천안에 사시는 어머님 그리워 천안에 내려가고 서울로 다시 가기가 싫어서 서성거리기만 했던 일이 기억에 새롭다. 당시는 천안서 서울까지 통근기차로 세시간 반이나 걸렸는데 월요일 새벽이면 나를 서울로 보내기 위해서 집안에서 새벽부터 난리를 치루곤 했다. 이런 일이 매주 반복되곤 했는데 어느 월요일에는 서울가는 기차를 도중 하차하여 다시 거꾸로 천안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집에 들어서니 어머님은 우물 곁에서 김치거리를 씻고 계셨다. 내가 그곳에 서 있는 것을 보신 어머니의 표정은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어지셨다. 방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길로 다시 역으로 나가 다음 기차편으로 서울로 쫒겨 올라오고 말았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어머님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무섭다고 할까 처연하다고 할까. 그 후로는 천안에 내려가는 일이 뜨문해졌다.

해방직후 미국 점령군의 통치하에 있을 때 당시 미국 군사정부는 소위 국립서울대학교 통합안(국대안이라는 약칭이 당시 통용되고 있었다)이라는 것을 발표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사회는 그야말로 좌우익의 정치 싸움으로 수라장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일제 식민지하에 그렇지 않아도 고등교육기관이 부족했던 상황이었는데 당시 소위 국립 고등교육기관을 국립서울대학교로 통합하겠다는 안이었다. 경성제국대학을 위시해서 10여개의 전문학교 및 고등학교를 하나의 국립대학으로 통합한다는 내용인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의 미 군정청 당국은 한국 국민들의 정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 잔뜩 좌경화되어 있었던 나는 즉각 국대안 반대 투쟁위원으로 활약하면서 국대안 반대 삐라를 전신주에 붙이고 돌아다니다가 경찰에 검거되고 말았다. 결국 검찰에 송치되었고 시골서 올라오신 아버님의 간절한 호소로 나의 호적에 붉은 줄이 그어지지 않는 방편으로 담당 검사는 나를 서대문형무소 미결감에서 서소문에 위치하고 있었던 소년감호소로 이감시키고 말았다. 내가 만 20세 미만의 소년이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한달 가까이 감호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나는 매일 같이 차입되는 사식으로 오히려 얼굴이 뽀얗게 피어올랐다.

석방되어 천안 집에 와보니 어머님의 얼굴은 부황이 나 있었다. 자식은 불기없는 차디찬 감방에서 꼬부랑 잠을 자고 있는데 당신은 편하게 지낼 수 없다하여 늦가을에 냉방에서 음식을 전폐하다 시피 사셨다는 것이다. 눈앞이 캄캄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당시 부황이 나 있는 어머님의 얼굴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 당시의 국대안 반대 투쟁위원 중에 오늘날까지 생존하고 있는 사람은 전무하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함 선생님께서 존경스러운 여인 둘을 꼽으셨다는데 한 분은 해남의 이준묵 목사님 부인이셨고 또 한 분은 나의 어머니셨다고 들었다. 지난 4월 5일 돌아가신 어머님을 그리며 야반에  함 선생님의 '나의 어머니'라는 사모곡을 읽으면서 80을 바라보는 나의 가슴 속에 나의 사모곡을 부르며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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