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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창의적인 물음, 통곡의 벽인가 마지노선인가
[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창의적인 물음, 통곡의 벽인가 마지노선인가
  • 박욱주
  • 승인 2020.10.19 16: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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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구자들의 창의성 결여가 비단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창의적 물음이라는 것이 우리 한국 연구자들에게는 결코 넘어갈 수 없는 통곡의 벽처럼 맞세워져 있는 경우가 많다. 종교철학을 전공했던 나는 박사학위논문 기획 단계에서 처음으로 이 난관을 제대로 마주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학위 취득 후에도 한동안, 기억하기로는 국내 KCI 등재지 연구논문을 10여 편째 작성할 즈음까지도 이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기실 논제 설정이나 물음의 구체화 자체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기존 연구자들의 노작(勞作)을 진득하게 탐독하기만 해도 물음과 논제가 머릿속에 쏟아지기 마련이다. 그 느낌은 마치 공허 가운데서 어떤 형상들이 생기(生起)하는 장면을 목도하는 것과 같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발생한다. 해당 논제 혹은 물음의 독창성을 검증하기 위한 조사가 필요하고, 그것에 접근하기 위한 구체적인 연구 방법 설정이 필요하다. 이 지점이 바로 연구자의 창의성이 가장 활발하게 발휘되어야 하는 대목이다.

연구자가 독창적인 물음에 답하려면 거의 반드시 기존에 정립된 연구 방법을 일정 부분 비판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후대의 화가가 반 고흐, 르누아르 같은 거장들의 유화 위에 덧칠을 하는 행위와 같다. 물론 덧칠을 한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칠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이미지를 보다 실재적으로 해석해 새로운 아름다움을 추가해야 한다. 예술작품을 두고 본다면 이는 명화를 모독하고 훼손하는 일이겠지만, 사유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재고하고 갱신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업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벽 앞에 멈춰 선 이들과 벽을 넘는 이들이 나눠진다.

말이 좋아 재구성이지, 실상 기존 사유 체계의 해체와 파괴가 동반되는 일이다. 논지가 약간만 흐트러져도 창의적 논의가 아니라 소설이 되어버릴 소지가 다분하다. 상당한 시간과 심력을 들여 내놓은 결과가 겨우 혼잣말과 공상이라면, 차라리 기존 연구자들의 길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안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아니 유혹이, 벽 앞에 선 연구자들을 갈등케 한다.

그러나 이런 실패 경험들은 일종의 실증적 실험 결과와 같다. 자연과학뿐 아니라 인문학 역시 무수한 관찰과 실험으로 점철된 영역이다. 그 속에는 인간의 삶, 사유, 기분, 의식, 그리고 의지에 대한 끊임없는 사고 실험이 존재한다. 모든 창의적 가설은, 그리고 물음은, 검증에 실패할 소지를 안고 있다. 서구 철학사에서 인간 정신의 보편적 고양에 대한 확신을 최후로 붙들었던 사상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상기해 보자. 그가 바라본 인류와 세계의 역사는 절대지(絶對知)를 향한 개방된 여정, 충만한 희망의 길이었다. 그러나 인류의 정신사가 그 정점에 이르기까지는 한시라도 참과 거짓, 지와 무지의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 없는 극한의 험로라는 사실을 헤겔 역시 절감하고 있었다.

여러 차례 실패를 무릅쓰고 인문학적 사고 실험에 도전하다 보면, 어느 순간 창의적인 물음이 통곡의 벽이 아니라 연구의 마지노선이 되는 때가 찾아온다. 물음이 창의적이지 않으면 스스로 연구가 만족스럽지 않고 즐겁지 않게 되는 때가 다가온다. 내 경우는 KCI 등재지 연구논문 20여 편을 작성할 즈음, 그리고 해외 우수저널 논문 게재에 하나씩 둘씩 성공하던 시점에 이런 내적 변화를 체험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최근 한국 학계 전반의 화두이자 대세로 자리 잡고 있는 학문 간 크로스오버와 융복합에 대한 관심과 열망으로 이어졌다. 미지의 영역에 대한 물음을 배수진 삼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이다. 내가 현재 진행 중인 한국연구재단 신진연구 역시 종교철학과 사이버네틱스의 융합연구이다. 창의적인 물음의 바다에 막 몸을 내맡겨 유영하기 시작한 이상, 다시 일전에 벽에 가로막혔던 상태로 돌아가기는 힘들 듯하다. 그만큼 미지를 향한 인문학적 사고 실험이 매혹적인 까닭이다.
 

박욱주
박욱주

 

 

 

 

 

연세대에서 종교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강사로 재직 중이며 한국연구재단 신진연구과제 연구책임자로서 종교적 실존과 사이버네틱스의 관계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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