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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철학, '主理論'의 틀에서 이해돼야 한다
율곡 철학, '主理論'의 틀에서 이해돼야 한다
  • 조남호 평화대학교
  • 승인 2004.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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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서평 : 『율곡집』(이이 지음)

조남호 / 국제평화대학원대학교·동양철학

지금의 고등학교 국사나 국민윤리 교과서에서 이황은 主理論, 이이는 主氣論이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이이의 문집을 살펴보면 주기론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이 없다. 단지 이이는 사단 칠정 논쟁에 이황의 理氣互發說에 맞서 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했다고 하는 것을 주기설의 근거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의 취지는 어디까지나 리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리의 작용성을 부정하려는 데 있었다. 또한 기질변화설을 근거로 이이의 학설을 주기설이라고 규정하는 연구도 있다. 그렇지만 기질 변화는 거의 성리학자 모두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이이에게 특별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최근에는 이이의 지각설을 바탕으로 주기론적 경향을 지적하는 연구 경향도 있다. 이이는 마음과 본성을 분리해 마음은 기이고 본성은 리라고 주장함으로써, 마음과 본성을 분리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학설은 지각을 중시함으로써 도덕 실천의 계기를 내부에 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것을 내부에서 찾는 주리론과는 구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각을 중시함에도 불구하고, 이이의 철학은 리와 그에 입각한 수양을 강조하고 있었다.

율곡학파, 주기론으로 자기동일성 확보되지 않아

이이를 주기론으로 보는 사고는 원래 퇴계학파에서 비롯됐다. 이황의 사상을 계승한 퇴계학파는 사단과 칠정을 주리·주기의 기준으로 삼아, 사단과 칠정의 분리를 반대하는 율곡학파를 주기론으로, 자신들은 주리론으로 규정짓는다. 그러나 이에 대해 율곡학파는 주기론으로 자신들의 동일성을 확보하려 하지도 않았고, 퇴계학파를 주리론이라고 규정짓지도 않았다. 이런 규정성이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다카하시 도루(高橋亨: 1878∼1967)에 의해서다. 다카하시는 주리·주기를 철학적·범주적 개념으로 이용해 조선 유학을 근대적으로 재구성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당시의 일제 어용학자들이 여전히 퇴계학파를 따르는 남인과 율곡학파를 존숭하는 노론으로 나뉘어 있는 것을 보고, 이 둘을 가르는 기준을 사단과 칠정에서 찾았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당파와 철학 이론을 결합시킴으로써, 조선이 멸망한 계기를 당쟁과 연결하려는 의도를 깔고 있다. 그는 '조선유학대관'에서, 조선의 사상이 6백40년 동안 주자학 일변도로 고착화돼 진보와 발전성을 상실했다고 하면서, 이를 국민성과 연결짓는다. 또 정당과 학파의 결합이 그 뚜렷한 특징이라고 논한다. 다카하시는 사단과 칠정에 대한 이황의 호발설이나 이이의 일도설을 모두 부정한다. 이황의 경우 칠정에도 절도에 맞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기발에만 한정시키는 잘못이 있고, 이이의 경우는 사단을 칠정 가운데 선한 부분이라고 인정하는데, 이는 사단에도 선하지 못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사단을 세우면 칠정에서 모순을 일으키고, 칠정을 세우면 사단에서 모순을 낳아 결국 논리상 난점을 벗어날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 결국 이런 식으로 조선 유학은 해결할 수 없는 난점을 가지고 소모적인 당쟁을 벌이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철학사 분류방식에 대한 주체적 반성 없다

다카하시의 주리주기식 구분은 한국 학자들에게 계승됐다. 한국의 학자들은 다카하시의 주리주기론을 답습해 한국철학사를 쓰면서도, 그것을 공식적으로 검토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한국 유학에 대한 새로운 도식을 만들어 낼 수 없었기 때문에 다카하시의 도식을 그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다카하시의 주리주기에 대해 제일 먼저 반응한 이는 박종홍이다. 박종홍은 이황의 리의 자기 촉발이 가능함을 설명하는 예로 다카하시를 들고 있고('박종홍전집' 1권, 434쪽), 이황과 기대승, 이이, 기정진의 학설이 "주리와 주기의 입장 차이에서 생긴 논쟁이다"라고 해 주리주기 도식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이황의 주리론이 “주기론자처럼 리기를 대상적인 자연계에서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감성의 관계로 먼저 보았다”('박종홍전집' 4권, 225쪽)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주리주기를 이성과 감정으로 보는 다카하시의 생각과 정신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어쨌든 박종홍은 “기왕에 일제시대에 일인 다카하시 도루 박사가 이에 착안해 어느 정도 연구 정리한 업적도 남겼거니와, 우리로서 좀더 철저하게 이퇴계 기고봉 시대에서 훨씬 이전으로 소급하여 조선왕조 초기 혹은 그 이전에는 이 문제가 어떻게 다루어졌는가를 면밀하게 알아보아 그 계통이 밝혀졌으면 좋을 줄 안다”('박종홍전집' 4권, 259쪽)라고 해, 다카하시의 주리주기론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종홍이 적극적으로 주리주기 도식을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이론에는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문제는 주리주기 도식이 박종홍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광범위하게 채택되고 있다는 데 있다. 따라서 주리주기 도식은 조선 철학사 분류방식에 대한 주체적이고 근본적인 반성의 부재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주기론 내지 기철학은 대체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기가 지니는 특징 중, 사회적·물질적인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는 철학이다. 이 철학은 송대 왕안석에 의해 대표된다. 그는 인간이 살아가는 양태를 객관적 현실이라고 보고, 도덕 수양보다는 객관적 현실을 인식하는 것을 중시했다. 따라서 현실의 물질적 필연성을 인식하고, 그에 따른 정치 제도의 개혁을 실행하는 것이 왕안석에게는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왕안석의 기 철학은 인간보다는 제도를 앞세우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아무리 ‘좋은 제도’를 완비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운용하는 '좋은 인간'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겼다. 이이의 철학이 제도 개혁론을 중시하는 점에서 이를 기철학으로 규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이의 제도 개혁론은 근본적이지 않고, 현실의 문제를 봉합하는 수준에만 머물렀다. 이 정도의 제도 개혁도 어디냐고 할 수 있지만, 벌써 조선왕조는 민생의 안정이라는 점에서 균열이 나고 있었다. 따라서 이이의 제도 개혁안을 굳이 리기론으로 환원시켜서 기를 강조했다고 설명하는 방식은 문제가 있다. 기를 강조하지 않고도, 리를 주장하면서 제도개혁론을 주장하는 유형원 같은 경우가 있다. 덧붙여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고 하는 주장도 근래에는 의심을 받고 있다. 이이가 군대의 제도 개혁을 주장했지만, 십만양병설은 근거가 없다고 한다. 십만양병설은 이이의 문집이 아니라 이이의 연보에 나온다. 이는 제자들이 사후에 만든 것에 불과하고, 십만양병설에 대한 시기도 '선조수정실록'과 '율곡연보'가 차이를 보인다.

율곡, 사회적 기준과 틀을 중시했다

기 철학의 또 다른 경향은 심리적인 의미의 기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이는 명나라 羅欽順을 비롯한 기 철학자들과 양명학자들, 그리고 명청 교체기의 학자들 사이에서 잘 드러난다. 기 철학은 인간의 마음과 대상 사이에서 일어나는 욕망에 주목한다. 욕망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태어나는 것으로 억압의 대상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의 기 철학은 욕망을 긍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기 철학은 규범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단지 기철학에 따르면 규범은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런 경향을 지녀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기 철학은 ‘리는 기의 운동 법칙이다’라고 주장한다. 기 철학은 기존 체제를 비판하는 철학으로서는 일정한 의미를 가졌지만, 개인적인 수준에서만 욕망을 긍정하기 때문에, 사회 전체 체계를 중시하는 주자학의 대안으로서는 지식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이가 기를 중시했다고 해서 욕망을 긍정하지는 않았다. 욕망긍정은 조선에서 허용되기 어려웠다. 그나마 許筠(1569∼1618) 정도가 이러한 의미의 기 철학자로 열거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철학 체계를 세우기도 전에 大北 정권에 이용됨으로써 학파로서 성립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조선에서 욕망을 긍정하는 기 철학은 수용되지 않았고, 오로지 주자학 중심의 학문 체계가 이뤄졌던 것이다. 이 점에서 이이의 철학은 단순히 주기론 혹은 기철학으로 분류돼서는 안 될 것이다. 이이의 철학은 주리론이라는 틀 속에서 이해돼야만 하고, 이황이 동기적인 마음을 중시했던 것에 비해 그는 사회적 기준과 틀을 중시했다는 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필자는 중국 및 한국철학을 전공했으며 서울대에서 '나흠순의 철학과 조선학자들의 논변'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카하시 토오루의 조선불교연구', '성리학에서 법과 윤리-박세당을 중심으로' 등의 논문이, '남명 조식의 철학사상 연구'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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