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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비평특집 : 『십문화쟁론』(원효 지음)
고전비평특집 : 『십문화쟁론』(원효 지음)
  • 고영섭 동국대
  • 승인 2004.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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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으로 화통하는 철학 공간…인도까지 영향

고영섭 / 동국대·불교학

古典이란 무엇인가. 그냥 옛날 책인가. 혹은 '苦戰'을 면치 못하게 하는 책인가. 아니면 누구나 고전인 줄 알지만 아무도 다 읽은 적이 없는 책(未完讀書)인가. 고전이란 시공 속의 무수한 비판의 칼날을 견디고 살아남은 書物이다. 그 비판의 칼날을 견뎌내지 못한 책은 이미 사라져 버려 고전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해 버렸다.
그러면 한국인의,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고전이란 무엇인가. 원효(617∼686)의 저술 87종 1백80여권은 오랜 역사 속에서 대부분 고전이 됐다. 현존하는 21종의 20여권 저술 역시 이후 일급 사상가들의 비판의 칼날을 물리치고 살아남은 책이다. 하여 그의 저서들은 오늘까지 한국인들의 가슴속에서 살아남아 고전으로서의 질긴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원효의 대표작은 한두 종이 아니지만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별기', '화엄경소'와 '열반종요', '판비량론', '십문화쟁론' 등은 특히 주목된다. 이들 저술들은 대부분 동아시아 사상계에 직간접적으로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많은 저술에 연기설화 및 절필 설화 등이 만들어졌지만, 이 '십문화쟁론'은 불교논리학의 대가인 陳那보살의 문도들에 의해 보살 논사의 본향인 인도에까지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론적 불교이해 총론적으로 和會시켜

원효 사상의 벼리로 평가되는 '일심'은 결국 '무애'로 귀결된다. 그의 학문적 화두는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함(歸一心源)으로써 중생들을 풍요롭고 이익되게 하는(饒益衆生)" 것이다. 이 일심과 무애를 매개하는 '和會'는 '열반종요'에 따르면 和諍會通의 약칭이다. 즉 화쟁은 다양한 주장들(異諍)을 조화시키고, 회통은 이치에 맞게 회통시키고(如理會通) 진실 그대로 화회한다(如實和會)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각기 다른 경문을 소통하고(通文異) 풀이해(解) 불설 교의의 뜻이 같음을 풀이해(會義同) 밝히는(明) 것이다.
저술명에 나타난 것처럼 '화(쟁)회(통)'은 '십문화쟁론'에서 하나의 논법 내지 방법으로서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이 저술이 완본으로 전해지지 않아 그의 다른 저술 및 후대 사상가들의 저서에 근거해 재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1944년 해인사 사간장경판 속에서 4매(9,10,15,16)와 불분명한 1매로 발견된 이 저술은 최범술 선생에 의해 판독돼 원문이 보완된 5매의 형태(매장 전후 27행, 1행 20자)로 공개됐다. 이후 연구자들에 의해 10문 모두가 보완돼 1)三乘一乘 2)空有 이집 3)佛性 유무 4)我法 이집 5)三性 이의 6)五性성불의 7) 二障 이의 8)涅槃 이의 9)佛身 이의 10)佛性 이의 화쟁문으로 복원됐다.
이 저술에 대한 첫 연구자인 조명기 선생은 10문이 '복수'의 의미로 사용됐다고 했다. 물론 10문은 당시 동아시아 불학의 핵심 키워드이며 10개의 개념쌍으로 범주화해 화쟁하고 회통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삼승-일승, 공집-유집, 아집-법집, 삼성의 동이, 오성의 차별, 번뇌장-소지장, 열반의 여러 뜻, 불신의 여러 뜻, 불성의 여러 뜻으로 말이다. 이 저술은 원효 4교판에서처럼 삼승 즉 일승은 무량승 즉 일승이라는 대전제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메시지는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매우 새로운 것이었다. 종파의 논객들은 대부분 자기 종파의 우월감에 매여서 '쓸데없는 논설'이 구름같이 일어났다. 즉 '자종은 옳고 타종은 틀리다'거나 '자설은 그러하고 타설은 그렇지 아니하다'고 주장했다. 하여 교판에 입각한 중국 종학의 논객들은 자종의 소의경론을 우월시하고 타종의 경론을 백안시했다. 이렇게 자기 중심적으로 치우친 국집으로 말미암아 황하와 한강처럼 크게 달라지게 됐다.
원효는 '거울이 만가지 형색을 다 받아들이는 것처럼, 물이 모든 물방울을 용납하는 것처럼' 다양한 주장들을 화쟁하고 회통하고 있다. 즉 그는 이 저술을 통해 붓다의 핵심 교설인 중도에 입각해 여러 종파의 담론들을 지극히 공명정대하게 교통정리하고 있다. 십문은 당시 동아시아의 담론들을 중도의 안목에 맞춰 범주화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십문화쟁론'은 당시 동아시아 불제자들의 각론적 내지 지말적 불교 이해를 총론적 내지 근본적으로 화회시켜내는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종파불교의 편향된 불교관 바로 잡아

당시 동아시아 불학은 '가장 나중에 오는 장작이 제일 위에 온다'(後來居上)는 교상판석적 이해 위에 있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불교 이해는 남쪽의 3교판과 북쪽의 7교판을 비판적으로 종합한 법화-천태학의 5시 8교판(지의)과 화엄학의 5교 10종판(법장)이 공고하게 확립됐다. 아울러 자은(법상)학은 3종교판을 세워 자종이 의지하는 '해심밀경'을 구극적 진리(요의교)로서 자리매김했다. 이들은 붇다의 설법을 시간으로 위계 지워 '법화경'(및 '열반경')과 '화엄경' 및 '해심밀경'이 가장 나중에 설해졌다고 했다. 해서 자종의 소의경론을 최상 내지 최후의 가르침으로 세우는 종파불교가 강력히 대두됐다.
원효는 이러한 편향된 불교관을 바로 잡아 붓다의 가르침을 삼승과 일승의 기호로 총론화해 평등하게 화회시키고자 했다. 그의 '십문화쟁론'이 간행되자 당시의 "대중들이 진실로 받아들이며 '훌륭하다'고 말했다"('고선사서당화상비') 한다. 종래 그 누구도 교판에 입각한 종학적 담론을 깨뜨리지 못했다. 그러나 원효는 이 저술을 통해 작은 틀에 국집된 교판적 혹은 종학적 사유의 문제점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원효의 개합자재, 입파무애적 담론은 당시 학계에 상당한 파문과 쟁점을 제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원효의 화회 담론이 파문만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십문화쟁론'은 오히려 경직된 인간 이해와 세계 인식의 틀을 깨뜨리고 새로운 사유틀을 제시한 것이었다. "원효가 '십문화쟁론'을 저작하자 진나의 문도들이 당나라에 와서 이 논서를 가지고 인도로 돌아갔다"(順高, '기신론본소집청기' 제2권 말)고 했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중국과 일본의 여러 사상가들에게 미치어 7~8세기 동아시아 불교담론의 내포와 외연을 심화 확장시켰다.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이는 한국의 태현, 표원, 균여, 지눌과 중국의 법장, 혜원, 징관, 종밀을 비롯하여, 일본의 선주, 양변, 심상 등으로 이어졌다.

나와 너의 분별을 무화시킨 인식전환의 기제

원효사상의 핵심 키워드는 '일심'임에도 불구하고 종래 일부에서는 '화쟁'이라고 오해돼 왔다. 때문에 '화쟁'(회통)을 책명으로 쓰고 있는 '십문화쟁론'이 그의 주저작으로 인정돼 이 저술이 그의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처럼 이해돼 온 적이 있었다. 이후 원효학 연구의 성과에 힘입어 그의 핵심 사유는 '일심'학이며, 그의 일심의 지형도는 '금강삼매경'과 '대승기신론소·별기'와 '화엄경소'로 이어지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여 '화쟁'(회통)은 일심과 무애를 이어주는 매개항이며, 나와 너, 인간과 자연, 종교와 종교 등의 분별을 무화시키는 인식 전환의 기제라 할 수 있다. 어떠한 사유든지 결정적으로 옳다거나 결정적으로 틀렸다고 하지 않아야 비로소 실체적 사유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원효의 '십문화쟁론'은 오늘 우리에게 다음과 전언을 주고 있다. 차이(공간)와 지연(시간)을 지닌 너와 나에 대한 깊은 통찰 속에서 1)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남이 할 수 있다는 것, 2) 내가 하지 않는 것을 남이 하고 있다는 것, 3)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남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서로가 1)인정하고 2)배려하고 3)대화하고 4)소통해야  5)행복(건강)한 삶이 이뤄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너와 나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아름답다. '십문화쟁론'의 메시지는 우리로 하여금 서로를 '다시' 만나고 '새로' 만나고 '깊이' 만나고 '크게' 만나기를 촉구하고 있다. 이는 '일심'의 '일'이 '크고' '넓고' '따뜻하고' '넉넉한' '하나'의 마음이라는 의미와도 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동국대에서 불교사상을 전공해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원효, 한국사상의 새벽', '불교경전의 수사학적 표현', '문아(원측)대사', '한국불학사', '연기와 자비의 생태학', '원효탐색', '중도의 불(교)학' 등이 있다.

<한국의 고전 어떻게 선정했나>

학계의 자문을 구해 고전비평의 대상도서를 원효의 '십문화쟁론', 이이의 '율곡집', 정약용의 '사서집주' 등 3권으로 정했다. 신라부터 조선까지 전통시대를 아우르며, 불교와 유교가 한국사상을 받쳐온 사상적 기저였다는 점을 감안해서였다. 문학서와 역사서는 제외했으며, 이 땅의 주체적 철학하기가 잘 드러나는 저술로 선정의 잣대를 삼았지만, 그럼에도 지면관계상 많은 고전들이 다루지 못했다. 원효는 한국을 넘어 동아시아 전반에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율곡은 세간의 율곡사상 독해가 잘못된 독해에 기반해있다는 지점에서, 다산은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와 유학적 사유에 대한 고민이 오늘날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판단 아래에서 선정됐다.
이 세권의 책을 다룸에 있어서 글의 형식은 서평임을 원칙으로 했지만, 율곡과 다산의 경우 저술을 남기지 않고 후대에 그들의 글을 하나의 문집으로 묶은 것이기 때문에 '책'을 대상으로 했다기보다는 '사상적 핵심'을 테마로 삼아 글을 전개시켰다. 율곡의 경우 필자는 '주리·주기론'적 틀 속에서 이해해온 기존 학계의 방식이 다카하시 도루의 철학사 분류법을 비판적 검토없이 받아들인 데서 비롯됐으며, 율곡의 텍스트를 살펴 이런 인식틀이 잘못됐다는 것을 밝혀내고 있다. 또한 정약용을 다룬 강신주 박사는 '여유당전서'에 포함된 다산의 四書 연구를 검토해 그의 사상이 어떻게 당대 유학을 비판적으로 넘어서려 했으며, 또한 그 한계에 묶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유교와 불교의 유사성, 유교의 유아론적 성격, 주체의 도덕성을 강조하는 사유의 흐름 속에서 읽어내며 이를 오늘날 현대유학담론의 갖는 한계와도 연결시키는 통시적 관점을 선보이고 있다. 원효를 다룬 고영섭 교수는 그의 사상적 핵심이 '화쟁'에 있다기보다 '일심'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십문화쟁론'이 당시 종파적 불교의 배타적 각론들을 총론화시키는 화쟁의 방법론을 선보이고 이를 다시 일심과 연결시켜주는, 원효 사상에 있어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저술이라는 점을 밝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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