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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고전비평 어떻게 할 것인가
특집 : 고전비평 어떻게 할 것인가
  • 조동일 서울대
  • 승인 2004.04.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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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도 진정한 창조자가 있어야 한다

옛날 책은 천 년 넘게 견디는데, 지금 출판돼 서점에 꽂혀 있는 것들은 백 년도 가지 못한다. 종이의 수명이 그만큼 단축됐다. 원가를 절감하면서 대량생산을 하는 기술이 상품의 효용 기간을 줄여 판매고를 늘이는 상술과 함께 발달해,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종이도 쉽사리 망가져 못쓰게 만든다.
그러나 종이의 수명과 책의 수명은 일치하지 않는다. 책에는 두 가지 수명이 있다. 종이가 견디는 한도인 외형수명과는 별도로 책 자체의 내용수명이 있다. 오늘날의 책 가운데 내용수명이 외형수명만큼이라도 긴 것이 얼마나 되는지 의문이다.  
소중한 것은 외형수명이 아닌 내용수명이다. 내용수명이 길면 외형수명은 늘일 수 있다. 다시 찍어내면 외형수명이 얼마든지 연장된다. 지금 우리가 읽는 고전은 원래의 외형을 지니고 있지 않다. 백년도 가지 않는 종이에 담겨 천년 이상의 수명을 누리고 있다. 오늘날의 말로 바뀌어 거듭 다시 태어나고 있다.
오늘날의 책에 대해서 쓴 위와 같은 글을 다시 들먹이는 이유는 고전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말이 그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고전이란 내용수명이 긴 책이다. 고전을 읽고 연구해 오늘날 다시 쓰는 책은 고전일 수 없으니 내용수명이 짧은 것이 당연하다고 할 것인가. 아니다. 앞 시대의 고전을 되살려 오늘날 것으로 다시 만들어, 후세에 물려줄 새로운 고전을 이룩하는 것이 학문 일꾼들이 할 일이다. 이 시대에도 진정한 창조자가 있어야 한다.
 
고전탐구의 핵심은 내용수명을 늘리는 것

옛 책의 외형수명은 서지학에서 맡아 평가한다. 오랜 외형수명을 누리고 있는 책을 소중하게 여겨 문화재로 보존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내용수명은 누가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는가. 읽고 주석하고 번역하면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세부를 정밀하게 살피면 전체가 흐려진다. 더욱 소중한 것을 알아내려면, 무엇을 다뤄 무슨 구실을 하고, 선행하는 여러 저술과 어떤 논란을 벌였는지 찾아 논하는 데 힘써야 한다. 그러나 그 결과가 내용수명을 입증해주지는 않는다.
책에 대한 후대인의 평가를 찾아 정리하면 내용수명을 사실로 고증할 수 있으나,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가치가 밝혀지지는 않는다. 앞으로 올 시대까지 유효한 가치를 말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내용수명은 새로운 연구자가 다시 찾아내야 비로소 이어진다. 다음 세대가 다시 하는 작업에 따라서 가감된다.
고전 탐구의 핵심 과제는 내용수명을 찾고 늘이는 것이다. 공연히 찬사를 늘어놓거나 추상적인 문구를 써서 가치를 입증하려고 하지 말고, 오늘날 제기되는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어떻게 소용되는지 밝혀 논해야 한다. 그 작업을 더욱 발전시켜 새로운 고전을 만드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고전이 우리 것이니까 훌륭하고 남의 나라 것은 그렇지 못하다고 할 것은 아니다.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고전은 우리 것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학문 연구에는 국경이 없다. 어느 나라에서 누가 산출한 것이든 새로운 가치를 발견해 활용할 수 있게 하면 훌륭한 고전이다. 그 범위를 넓히는 것이 학문 발전의 필수 요건이다.
어떤 고전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거나 모자란다고 하는 진단은 무의미하다. 문화적인 창조물에 대한 평가에는 공인된 등급이 있을 수 없다. 여론 조사나 통계의 방법을 쓰면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탐구하는 사람 자신이 그 책에서 무슨 가치를 발견해 자기가 하는 작업을 위해 어떤 도움을 얻는지 말하는 것만 타당하고 유효한 평가다.
고전의 가치를 공평하게 평가한다면서 장단점을 열거하는 것은 헛수고다. 장단점이 상쇄돼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단점을 강조해서 말하면서 그런 단점을 극복하려면 치료제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 치료제를 자기가 개발하는 것이 탐구의 과제다. 치료제가 될 가치를 재내하지 않은 고전은 고찰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면 그만이다. 특별한 광맥을 발견하지 않은 땅은 파지 않고 그대로 두면 되는 것과 같다. 광맥이 없다고 나무라고 개탄할 일은 아니다.
광맥은 발견할 수 있는 사람만 발견한다. 발견하면 기쁨이 크다. 광맥을 발견하고 기뻐한다고 핀잔할 일은 아니다. 착각이거나 과장이라고 나무라지 말아야 한다. 자기는 동의할 수 없다는 반론을 앞세우려고 하지 말고, 이룬 결과를 보고 성실하게 토론해야 한다. 발견한 가치가 그 자체로 논술되고 평가될 수 없다. 출발점보다 도달점이 더욱 소중하다. 새로운 연구 작업에서 실제로 활용해 좋은 결과를 산출해야 가치가 입증된다. 그렇게 해서 고금합작을 하는 것이 당연한 과정이고, 새로운 이론 창조가 최종 목표이다.
새로운 이론을 창조하기 위해 택하는 합작 상대가 세상에서 너무 높이 평가돼 우상화된 것이면 곤란한 점이 있다. 찬사를 보내는 데 동참하느라고 정작 해야 할 일에는 착수하지 못할 수 있다. 덜 알려졌거나 묻혀 있는 쪽을 찾아 재인식하면 새롭게 활용할 가치를 발견하는 감격을 쉽고 누리고, 휘어잡아 다루는 데 힘이 적게 든다. 새로운 창조는 기존의 성과를 내부에서 뒤집고 겨뤄 이겨내야 가능하므로 상대를 잘 만나야 한다.
고금합작을 하지 않고 새로운 이론을 바로 창조하면 어떤가. 고인이 이미 얻은 바를 활용하면 수고를 줄이고 설득력을 높일 수 있다. 중요한 문제는 오랜 기간을 두고 거듭 논의하면서 얻은 결과를 축적하고 쇄신하는 것이 마땅하다. 모든 창조행위가 다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문학창작이라도 많이 다르지는 않다. 문학창작에서는 숨겨두는 선행 작품과의 관련을 사상창조에서는 드러내 논하는 것이 차이점이다.
고금합작을 하면 원전의 뜻을 오해했다는 비판을 들을 수 있다. 그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지 않으려면 고금합작을 슬기롭게 해야 한다. 자기가 새롭게 전개되는 논의로 넘어오는 경계가 표 나지 않게 앞뒤를 잘 잇는 기술이 필요하다. 얻은 결과가 논자의 것이라고 하면 건방지다는 나무람을 들을 염려가 있거든 고인의 생각을 풀이했을 따름이라고 하고, 실수가 있었다면 능력 부족한 탓이라고 변명하는 작전을 써야 한다.  

고금합작을 통한 이론 창조

'철학사와 문학사 둘인가 하나인가'라는 책에서, 의상의 '華嚴一乘法界圖'에 대한 김시습의 주해를 검토하면서 내 견해를 제시하고자 했다. 김시습은 의상이 남긴 글을 잘 알 수 있게 한다면서 내부에서 뒤집어엎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고전의 재창조를 어떻게 하는가 알려주는 좋은 본보기다. 김시습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도 그렇게 하려고 했다.
의상은 최고의 완성도를 갖추고 모든 이치를 집약한 시 한 편만 지었다. 김시습은 진실을 찾는 방법을 널리 구해 잡다한 논의를 폈다. 의상은 오직 숭고한 것만 숭상했다. 김시습은 비장ㆍ우아ㆍ골계를 두루 들먹이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계속되는 탐색과 시험이 있을 따름이라고 했다.
여럿이 하나이고 하나가 여럿이라는 것은 둘이 함께 말한 진실이다. 그런데 의상은 여럿에서 하나로 되돌아가야 마땅하다고 하고, 김시습은 하나를 헤치고 여럿으로 나와야 한다고 했다. 멀리까지 가지 말고 누구나 각자 농사지으면서 살면서,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것 자체가 깨달음이라고 했다. 그런 체험을 어느 한 가지 글쓰기로 나타낼 수 없다고 여겨 무엇이든지 받아들이고 닥치는 대로 시험해 글쓰기의 방법을 확대했다.
여럿이 여럿인 모습을 더 넓게 찾으면서 나는 여럿과 하나의 관계를 다시 문제 삼았다. 의상과는 다른 쪽에서 원효가 하나와 둘의 관계를 논한 것을 대안의 원천으로 삼았다. 더 많은 논의가 이루어진 전례를 기 철학에서 찾아 서경덕을 만나고, 홍대용과 박지원, 安藤昌益과 볼테르를 토론 상대로 삼았다. 그렇게 해서 相生이 相克이고 相克이 相生이라고 하는 生克論을 제조했다.

필자는 서울대에서 '영웅소설 작품구조의 시대적 성격'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생극론: 21세기 문명 창조의 지침', '한국문학사의 시대구분' 등의 논문이 있고 '세계문학사의 허실', '인문학문의 사명', '철학사와 문학사 둘인가 하나인가',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 등의 저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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