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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우리시대 학자들의 文體論
특집 : 우리시대 학자들의 文體論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04.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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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곡의 글쓰기 혹은 평범함 속의 날카로움

문장은 잘 읽히면 된다는 게 상식이다. 그렇지만 삶의 격조를 생각한다면 이것으로 모자라다. 내면을 맑게 비추는 절제된 수사학은 글 읽는 일을 행복감으로 떨리게 하고, 문투에 묻어나는 개성은 글과 사람의 경계를 지우며 가슴에 애틋한 선망을 남긴다. 할말만 툭툭 던지는 무심한 글, 수사만 잔뜩 부리는 글, 정체모를 짜깁기 글이 넘쳐나는 요즘 나름의 독특한 문체의 경지를 획득한 학자들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을 듯하다.

많은 학자들에 의해 우리시대 가장 독특한 문체의 소유자로 지목되는 김영민 한일장신대 교수(철학)는 그가 만든 좁디좁은 협곡 속으로 독자를 몰아넣는다. 서너 번은 배배꼬인 주술관계와 탈식민적 글쓰기의 산물인 난해한 한자어의 숲을 통과하면 독자의 정신은 기진맥진해지기 일쑤다.

하지만 그 난삽성에 대한 ‘문체심리학적’ 고충을 겪고 나서야 만나는 명징한 의미의 풍경은 피로감을 말끔히 씻어준다. 이런 고진감래는 글쓰기에 수반되는 정교한 자기성찰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김 교수의 글은 자신의 내밀한 경험을 독서와 연관시키는 여러 갈래의 창조적 오솔길로 호감을 얻고 있다. 물론 한계도 지적되는데 “문체가 너무 강해서 무슨 말인지 모를 때가 있다”, “비판에 열중한 나머지 자기철학 구축이 약하다”, “형식이 내용을 삼킨다” 같은 지적들이다. 좋은 글과 그렇지 못한 글은 이렇듯 장점이 곧 단점이 돼버리는 동전의 양면이자 위태로운 줄타기다.

글의 무늬, 그 명징한 의미의 풍경

부산대의 문장 2인방으로 거론되는 강명관 교수(한문학)와 이왕주 교수(윤리학)는 대조적인 문장의 결을 보여준다. 강 교수는 조선시대 저자거리의 풍속을 담아내는 일련의 저작을 선보였는데, 일반적인 학자들의 글이 조심스럽고 우유부단함에 비해 선호가 분명하고 직선적인 게 특징이다. 여기에 약간의 통찰력이 가미되니 글이 힘있게 쭉쭉 뻗어나간다. 반면에 이왕주 교수의 글은 소프트하고 입에 군침이 고일 정도로 달콤하다는 게 팬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스타일과 개성이 탁월한 데 비해, 사상을 잘 소화해내고 있는 느낌은 적다는 의견도 있다.

평범한 것이 가장 아름다움을 실천하는 문장가들도 많다. 대표적인 이가 유홍준 명지대 교수(미술사학)다. 말 잘하고, 흥미롭고, 재미도 있는 글로 인기를 얻는다. 어려운 주제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글에 드러내는 축이 있고, 생략하는 축이 있다. 유 교수는 후자 쪽이다.

잘 짜여진 글로 문장의 성채를 짓는 이들로는 한형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철학)와 임지현 한양대 교수(서양사)를 들 수 있다. 한 교수의 글은 논문 위주로 이뤄지는데 “짜임새가 있고 군더더기가 없다. 나의 얘기와 남의 얘기가 선명하게 분간되기 때문에 결이 살아난다”라는 추천이다. 임 교수는 이와는 약간 다르게 “논리의 아귀가 꽉꽉 들어맞는 화려한 수사학”이 돋보이는 학자다. 이른바 ‘이론적 미문’의 전형을 보여주는 그의 글에는 ‘세련’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으로 보인다.

현실적 실천을 전제로 한 글쓰기를 주로 하는 학자들의 글도 문체에서 미묘한 차이가 느껴진다. 김진석 인하대 교수(철학)는 “자신을 감추고 이론을 앞세우는 현학적” 분위기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소신있게 말하는” 강단진 글쓰기로 성공적으로 변신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의 문장이 지닌 매력은 철학자의 눈으로 보는 세상, 즉 섬세한 분석과 숨김없이 말하기의 조합에서 생겨나는 듯하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는 양적으로 왕성한 글쓰기를 하면서도 그 질을 유지하는 비법에 대해서 사람들이 궁금해할 정도다. 아마 ‘한여름의 소낙비’의 비법이 아닐까. 시쳇말로 ‘한놈만 팬다’는 식으로 쟁점을 붙잡으면 그 쟁점의 본질에 도달하는 글쓰기의 단거리 판을 짜고 온갖 사례들을 동원한 포위전술로 글쓰기의 대상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고립시키는, 그렇게함으로써 그 대상이 스스로 뭔가를 뱉어내게 하는 게 돋보인다.

강준만 교수와는 또 다르게 강직한 비평문체로 거론되는 이가 도정일 경희대 교수(영문학)다. 유려하면서도 동시에 패기가 느껴지는 어려운 경지에 도달해있다는 것이 학계의 중평인데, 때로는 선동적이고 자기주장만 내세워 문체에 고집스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는 불만도 있다.

이탈리아 볼가타의 애틋한 형용사를 잘 버무린 단테의 ‘신곡’처럼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운 문체의 소유자는 누구일까. 한국어 글쓰기에서 이런 애틋함을 발휘하는 이로는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학)와 이광주 인제대 명예교수(서양사)가 꼽힌다. 배 교수의 문체를 바라보는 시각은 서로 모순된다. 어떤 이는 평범함 속의 날카로움을 보고, 어떤 이는 현학적 수사와 기교의 뛰어남을 본다. 왜 그럴까. 아마 생활어를 감칠맛 나고 화려하게 쓰기 때문일 것이다. 배 교수 만큼 일상어이면서도 참신한 단어를 골라쓰고, 이제는 쓰이지 않는 死語까지도 거침없이 구사해 문화현상을 예리하게 분석하는 이도 드물 것이다.

이광주 명예교수는 서구지성사를 전공으로 하면서 귀족취향의 예술사로 보폭을 넓혀왔다. 그의 글은 이런 삶의 표본이다. ‘지상의 아름다운 책 한 권’(한길사 刊)에 나오는 “성당은 한 척의 선박, 마스트는 첨탑이요 돛은 날씨에 따라 오르내리는 구름이다”라는 구절은 서구의 지성사와 예술사 깊숙이 수놓아진 인간 정신의 향취를 쫓으려는 내밀한 욕망의 적절한 시각화가 아닐 수 없다.

탁 트인 글쓰기와 긴장된 호흡

동양학계에서는 한글세대를 위한 글쓰기가 하나의 화두로 자리잡고 있다. 그 선두주자로 정민 한양대 교수(한문학),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중문학), 이승환 고려대 교수(중국철학), 안대회 영남대 교수(한문학) 등이 거론되고 있다. 이 가운데 정민 교수는 ‘문장론’ 전공자답게 고전시대 ‘소품문’의 실체에 가장 근접한 전형을 획득하고 있다는 평이다. 특히 정 교수의 한시풀이는 “여운을 주는 글쓰기”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 끝나는 글, 힘줘서 말할 만 한데 지나가는 투로 끊어버리는 자세가 모이고 모여서 ‘단아함’을 이뤄낸다.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와 이진우 계명대 교수(철학)는 수동적 문체와 능동적 문체의 차이를 열어보이는 듯하다. 김 교수의 문장에서는 문체에 대한 욕심을 경계하는 데서 오는 긴장감, 그리고 기대고 있는 사상의 무게에 자신의 목소리가 눌리는 것을 경계하는 데서 오는 긴장감이 합해져서 글을 조직한다는 분석이 있다. 반면에 이 교수는 전공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와 뛰어난 외국어실력으로 대상을 장악하고 큰길을 만들어가면서 글을 쓴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계율에 묶이고 탈피하기를 반복하는 글쓰기와 탄탄대로를 탱크처럼 진주하는 글쓰기는 물론 각각의 고유한 맛이 있을 것이다.

문장가로 거론된 학자들은 대부분 대중적 글쓰기를 실천하고 있는 학자들이다. 그리고 학문의 경계를 오가는 이들이 많다. 좋은 문장은 스스로를 낮추고 넓게 보는 데서 비롯된다는 점을 알려주는 것일까.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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