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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희의 박물관 여행]국가 폭력의 현장에서 민주와 인권의 기념관으로
[박찬희의 박물관 여행]국가 폭력의 현장에서 민주와 인권의 기념관으로
  • 교수신문
  • 승인 2020.10.13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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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희 박물관 칼럼니스트

고문 역사 남영동 대공분실
민주인권기념관으로 탈바꿈

인권 유린 당한 피해자들
현장 마주하며 치유 받아
민주인권기념관 외경. ⓒ박찬희

전철 1호선 남영역, 분주하게 오가는 시민들 사이로 낯선 건물이 보인다. 건물 대부분이 승강장 지붕과 담에 가려서인지, 눈을 자극하지 않는 검은색 벽돌 건물이어서인지 사람들은 그 건물을 쉽게 인식하지 못한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영역과 마주한 그곳은 오랫동안 은밀하게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조각낸 곳이다.

그곳은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이름만 들어도 서늘해지는 그곳은 깊숙하고 으슥한 산속이 아니라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았다. 고문으로 악명 높던 그곳은 이제 민주와 인권을 기념하고 생각하는 민주인권기념관이 됐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민주와 인권이 저절로 오지 않았듯 민주인권기념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인 국가 폭력의 현장은 어떻게 민주인권기념관이 됐을까?

1977년 치안본부 대공분실, 즉 남영동 대공분실이 준공됐다. 겉으로는 국제해양연구소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민주화운동가와 일반 시민을 불법으로 구금하고 고문을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곳의 실체를 비밀로 유지할 수는 없었다. 1985년 민청련 사건으로 23일 동안 고문을 받은 김근태에 의해 이곳의 실상이 폭로됐다. 당시 고문을 가한 경찰들은 가까스로 처벌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고문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87년 1월 박종철은 이곳에서 고문을 받다 숨을 거뒀다. 자칫 영원히 묻힐뻔한 이 사건은 여러 사람들의 노력 끝에 세상에 알려졌고 결국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박종철기념전시실. ⓒ박찬희

남영동 대공분실, 시민 품으로

그러나 6월 민주항쟁 이후에도 이곳은 여전히 존재했다. 마침내 2005년 대공분실 기능이 다른 곳으로 이전했고 이 건물에는 경찰청 인권보호센터가 들어섰다. 그 후 이곳을 인권을 기리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시민단체의 노력은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됐고, 드디어 2008년에는 박종철기념전시실이 문을 열었다. 그가 비극을 겪은 곳에 그를 기념하는 공간이 들어선 것은 매우 의미가 깊었다. 박종철기념사업회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곳을 시민이 관리하는 인권기념관이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민주화운동기념관을 건립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했다. 그 후보지로 거론되던 곳 가운데 한 곳이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2017년 상황을 진전시키는 뜻밖의 계기가 생겼다. 그해 12월에 개봉한 영화 <1987>이 적지 않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영화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남영동 대공분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이곳을 시민의 품으로 돌려줘야 한다는 여론이 커졌다. 때맞춰 시민사회도 이곳을 인권기념관으로 바꾸려는 다양한 노력을 전개했다. 그 결과 2018년 6월 문재인 대통령은 6·10 민주항쟁 31주년 기념사에서 이곳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조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1977년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시작된 이곳은 마침내 민주와 인권을 담은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변모했다. 이런 점에서 민주인권기념관은 대공분실 당시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 이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전환된 역사 또한 매우 중요한 곳이다.  

민주인권기념관의 독특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민주인권기념관에서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전시물은 민주인권기념관 그 자체다. 이런 점이 새로 건물을 지은 기념관이나 박물관과는 사뭇 다르다.

5층 조사실 복도에서 본 남영역. ⓒ박찬희

철저하게 고문과 조사를 위한 공간

민주인권기념관은 밖에서 건물을 보는 순간부터 관람이 시작된다. 검은색 벽돌로 지어진 건물은 육중한 느낌이 강하다. 담에 쳐진 철조망은 이곳이 예사롭지 않은 공간임을 암시한다. 무겁고 낯선 느낌을 결정적으로 끌어올리는 건 정문에 설치된 위압적인 대문이다.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이 철문은 기계를 작동해야 움직인다. 이때 탱크가 지나가는 듯한 소리가 난다. 만약 관람객이 눈을 가린 채 끌려온 당사자라면 이 소리는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건물로 들어가는 출입구는 두 곳이다. 정문은 다른 건물과 비슷하지만 후문은 마치 입구가 없는 것처럼 교묘하게 설계됐다. 이곳에 들어서면 1층에서 곧바로 5층으로 올라가는 철제 원형 계단을 만난다. 5층에 있는 조사실까지 이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는데 빙글빙글 돌기 때문에 방향이나 높이 감각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게다가 발을 디딜 때마다 나는 “쿵쿵” 소리가 통로를 울린다. 눈이 가려진 상태라면 더욱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유일하게 원형이 보존된 509호실. ⓒ박찬희

치유의 현장으로 재탄생

조사실 복도 끝 창문으로 남영역이 내려다보인다. 그곳에서 전철과 기차 오가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온다. 일상과 바로 잇닿은 이 공간에서 국가 폭력이 버젓이 일어났다. 조사실은 서로 볼 수 없도록 엇갈리게 배치됐다. 조사실 안에는 침대, 욕조, 책상이 있으며 벽은 방음 시설이 설치돼 있다. 세로로 난 작은 창은 사람 머리 하나 빠져나갈 수 없는데, 투신을 막기 위해 이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조사실은 철저하게 고문과 조사와 감시를 위해 만든 곳이어서 최소한의 인권이라도 배려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한 이곳은 박종철이 목숨을 잃은 509호실을 제외하면 모두 원형이 바뀌었다.

관람객들은 연행자들이 끌려갔을 그 길을 따라 걷는다. 그러면서 순간순간 국가 폭력의 실상을 인식하고 민주와 인권을 되살펴 본다.
민주인권기념관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이곳에서 직접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이 생존한다는 점이다. 피해자들이 경험한 시간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가까운 옛날이다. 그런데 인권 유린이 자행된 중앙정보부 남산 별관과 같은 건물들은 대부분 원형이 상당히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곳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곳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나는 간첩이 아니다” 특별전. ⓒ박찬희

지난해 이곳에서 특별한 전시회가 열렸다. “나는 간첩이 아니다” 이곳과 다른 곳에서 혹독한 고문 끝에 억울하게 조작 간첩이 돼야 했던 피해자들의 치유 과정을 다룬 전시였다. 이들은 카메라를 들고 그들이 고난을 겪었던 현장을 어렵게 마주했다. 그 현장과 마주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곳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한발 한발 그 공간으로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촬영한 사진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 장소는 민주인권기념관 5층이었다. 바로 조사실이 있던 곳이다. 그들이 잊지 못할 고통을 받았던 그 현장이 어느새 전시실이 됐다. 복도 벽에는 전시 제목이 붙었고 공포가 가득했을 조사실마다 사진과 글이 붙었다. 고문의 현장에 붙은 사진과 글은 그들이 조금씩 치유가 되고 있음을 알려줬다. 이곳은 고문의 현장이 전시실이 되고 치유의 현장이 되는 역설이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의 역사는 끝나지 않은 채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때문에 앞으로 이곳에서는 특별한 공간과 프로그램이 지속적으로 모색돼야 한다. 추모 시설이나 기념 조형물의 설치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피해 실상을 조사할 수 있는 공간과 체계적인 치유 프로그램이 마련될 때 민주인권기념관은 더욱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 될 것이다. 자료와 유물의 수집, 연구, 전시, 교육이라는 박물관과 기념관의 기본적인 역할뿐만 아니라 피해 당사자를 위한 노력이 필요한 건 이곳이 과거에는 남영동 대공분실이었고 지금은 민주인권기념관이기 때문이다.

2년 후인 2022년 민주인권기념관이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한다. 이곳이 지금 상황에 맞는 민주와 인권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발신할 때 이곳은 늘 현재로 존재하는 기념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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