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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_'실미도' & '태극기 휘날리며'
영화비평_'실미도' & '태극기 휘날리며'
  • 김시무 영화평론가
  • 승인 2004.04.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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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만든, 그러나 우리끼리 보고 끝내는 영화?

마침내 한국영화 1천만 관객동원 시대가 열렸다. 그것도 불과 두 달간의 시차를 두고 상영된 두 편의 영화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연거푸 1천만 명을 돌파하는 엄청난 흥행신기록을 수립한 것이다. 도대체 이들 영화에는 어떤 특별한 것이 있기에, 너도나도 앞 다투어 이 영화들을 관람하게 된 것일까.

일단 작품의 주된 흥행적 요소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실미도’는 그 동안 공식적 역사기록에서는 철저히 말살돼 한번도 영화의 소재가 된 적이 없었던 북파공작(주석궁 침투 목적으로 창설된 684부대)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소문으로만 무성했고, 이따금 북파공작원 출신들의 복권 및 보상 문제 시위로 그 실체가 희미하게나마 드러난 비극적 사건을 소재로 했다는 점이 전 국민적 호기심(관심)을 발동시켰다고 할까. 비범한 흥행감각의 소유자인 강우석 감독은 기왕의 프로젝트를 제쳐놓고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만한 민감한 이야기꺼리에 적극적으로 손을 댔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제 이 정도의 ‘불순한’ 이야기는 커다란 제약 없이 다룰 수 있다는 시대적 분위기도 작용했을 터다. 소재주의의 덕을 톡톡히 본 경우라 하겠다.

소재주의를 넘어선 연출의 힘

그러나 이 영화에는 소재주의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역사적 비극마저도 남성적 액션 드라마로 치장할 수 있는 강 감독의 연출능력이다. 영화는 실화에 바탕을 뒀다고 하나, 역사적 고증에 충실한 사회 비판 드라마는 아니다. 사형언도를 받은 죄수들을 차출해 부대를 구성했다는 영화적 설정은 언론을 통해 상당부분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입증됐다. 실미도 부대원들의 반란의 기폭제가 됐던 정부 차원의 부대원 사살 음모도 역시 하나의 음모설로만 남아있다. 설령 그랬다 해도 그것을 확인해줄만한 공식문건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불가피하게도 그 부분은 픽션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그 픽션 부분이 영화의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등장인물들에 대한 동일시(또는 동정심)를 유발한 결정적 作人이었다는 점이다. 정부의 잘못된 대북정책은 언제나 은폐돼왔고, 그에 대한 실체적 진상규명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결국 현대사의 한 비극적 사건의 고리를 푸는 역할은 탁월한 흥행감각의 소유자인 예술가(감독)에게 맡겨졌고, 그에 의해 그 사건은 ‘안티영웅의 신화’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천만 관객이 열광했던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이에 비해 강제규 감독의 기획은 좀더 무모해 보였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전형적인 전쟁영화라는 점과 어느 정도 보수적 뉘앙스를 담고 있는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제목도 흥행에 걸림돌이 될 공산이 컸다. ‘극우영화’냐는 비아냥도 있었다. 단순히 애국심에 호소하는 그런 종류의 전쟁물이라면, 이미 수 백편 제작된 적이 있고, 일부를 제외하고는 흥행성공으로까지 이어진 경우도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제규 감독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그는 소재 자체보다는 그것을 표현해내는 방식 및 스타일에 전력투구를 했다. 요컨대 기존 국산 전쟁물들이 국방부의 물량 지원을 받아 대충 구색을 갖추고, 판에 박힌 전쟁무용담을 펼쳐가는 데 만족했다면, ‘태극기 휘날리며’는 철저하게 리얼리티 효과를 창출해 내는 데 치중했다는 점이다.

'안티영웅', 국익에서의 일탈이 주는 쾌감

요컨대 강 감독은 무엇(what)을 보여줄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는 어떻게(how) 보여줄 것인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2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스필버그 감독의 전쟁영화 ‘라이언 일병구하기’가 리얼한 전쟁장면으로 전세계의 눈길을 사로잡았다면, 우리라고 해서 못할 것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리라. 그것도 할리우드와 비교해볼 때 10분의 1정도 밖에 안 되는 제작비로 그는 한 편의 그럴듯한 전쟁스펙터클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일명 ‘원빈 일병구하기’라고나 할까. 게다가 그는 한국전쟁을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부각시키기보다는 애절한 형제애를 구현하는 무대로 제한함으로써 이념논쟁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관객 역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담감 내지는 부채의식 없이 국가적 대의보다 소중한 가족사랑에서 진한 감동을 만끽한 채 극장 문을 나설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공적 영역의 사적 영역으로의 후퇴랄까.

이렇게 볼 때 ‘태극기 휘날리며’는 ‘실미도’의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다. 이 작품 역시 공동체의 선을 위해 희생하는 영웅적 주인공을 그리기보다는 오로지 친동생 하나 구하려는 일념에 좌충우돌하는 ‘안티영웅의 신화’를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평자는 할리우드의 대형 블록버스터 장르영화가 공공선을 위해 투신하는 개인적 영웅의 활약상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에 비한다면, 이러한 반-영웅적 캐릭터의 설정은 무척이나 예외적이라고 지적한다. 여기에는 물론 이유가 있다. 일찍이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사회에서 상상 공간 속에서나마 공공선을 추구하는 주인공이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반면 개인보다는 언제나 국익이 우선이었던 우리사회에서 그것으로부터의 일탈은 짜릿한 쾌감을 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제 이 두 작품의 흥행성공으로 한국영화는 보다 튼실한 산업적 토대 위에 올라 선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렇게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다. 우선 무엇보다도 관객 1천만이라는 수치가 곧바로 작품 자체의 질적 수준 자체를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소재주의 내지 안티영웅의 신화는 작품의 질과는 상관이 없다. 이 두 편의 작품은 아주 잘 만든(well-made) 영화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러나 여전히 내용적 규정성에 얽매어 있다. 무슨 말인가.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곧 세계적인 것이 아님을 여실히 입증해 주었다. 요컨대 가장 한국적인 것은 그냥 가장 한국적인 것일 뿐임을 역설적으로 입증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만들어 우리끼리만 보고 즐기는 그러한 경향이 훨씬 농후해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렵사리 할리우드로 대변되는 영화 제국주의에서 탈피하고 있지만, 그 반작용으로 문화적 쇄국주의에 빠져들고 있지 않나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시무 영화평론가

필자는 루카치 미학과 구조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영화미학 연구자이자 영화평론가로 활동중이다. 논문으로 '구조주의적 영화기호학 연구', '수동적 관객성과 능동적 관객성' 등이 있고, 저서로는 '영화예술의 옹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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