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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_이응노 탄신 1백주년 기념전
미술비평_이응노 탄신 1백주년 기념전
  • 김준기 미술평론가
  • 승인 2004.04.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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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의 세계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나

▲군상 ©
顧菴 이응노(1904∼1989)의 탄신을 기념하는 1백년이 되는 해다. 이응노미술관의 특별전, 대전시의 이응노미술관 유치 결정, 국립현대미술관의 대규모 회고전 계획 등 고인을 기리는 일이 연이어지고 있다. 고국의 거부로 불귀의 객이 된 비운의 예술가를 제대로 조명하는 자리가 열린다는 점에서 이응노 재조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음을 실감하고 있다.

조형양식사적 비평의 한계

이응노 재평가의 외적인 풍요로움의 이면에는 아직도 풀지 못한 숙제들이 널려있다. 한 세기를 관통한 이응노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의 예술을 우리의 풍요로운 문화적 자산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있어서, 본질적으로는 걸림돌이 되고 있는 한국사회의 이율배반이 여전히 굳게 장막을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윤이상과 백남준의 경우에도 고암과 유사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근년에 들어 통영에서 열리고 있는 윤이상음악제가 세계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만들어내고 있고, 경기도가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백남준미술관 건립 또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이응노미술관도 유족의 사설미술관 차원에서 공공미술관으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렇듯 해외에서 활동한 거장을 기리는 사업들이 한창 진행 중이긴 하지만, 근현대사의 대립과 갈등을 그대로 내재한 채 외피만을 바꿔나가고 있는 한국사회가 과연 이들 거장을 사회비평적 맥락에서 제대로 읽어내고 있는가 하는 점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이들 예술가들을 우리의 문화적 자산으로 내세울만한 자격이 있는지 심난하게 반성해봐야 한다. 이응노와 윤이상을 냉전이데올로기로 내몰아 불귀의 객으로 만든 한국사회다. 백남준의 명성을 빌어 한국 미술계의 대표주자인양 내세우려 하는 일 또한 따지고 보면 낯뜨거운 일이다.

시각예술계의 필봉들은 고암 이응노를 ‘묵죽화, 실경산수, 수묵추상, 꼴라주, 문자추상, 군상’ 등의 순으로 정리해왔다. 거의 한 세기에 걸쳐 조형적 혁신에 혁신을 거듭했으니, 이러한 평가는 응당 화가 이응노를 언급하는 데 있어 빠질 수 없는 얘기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형양식사적 서술의 귀결은 대부분 미술 내부의 논의에 그치고 말았다. 우리의 미술사나 미술비평 방법론이 양식사와 정신사를 꿰뚫는 데 서툴렀기 때문이거니와, 특히 고암의 경우 조형방법의 흐름을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예술은 나의 무기다’라고 선언하면서, 예술과 현실의 통합적 시각을 추구했던 고암의 진면목을 일별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치열한 한 삶을 통해 일군 고암의 예술을 바라보는 데 장애요소가 되는 이율배반의 핵심은 다름 아닌 ‘동양과 서양, 제국과 식민, 1세계와 3세계’등의 이분법에 의한 문화식민의 시각이다. 적지 않은 미술계 논자들이 아직도 고암을 가뒀던 한국 또는 동아시아의 모순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道器合一과 횡단의 미학

▲구성 ©
20세기 내내 서구의 과학기술문명은 물론 그들의 철학과 예술을 뒤쫓아 다녔던 동아시아권의 숙제는 어떻게 해서든지 西勢東占의 세계사적 흐름을 부정하려 한다. 거역할 수 없는 대세에 편승하면서도 최소한의 자존심이라도 지키려는 합리화 논리가 바로 東道西器다. 이러한 캐치프레이즈야 말로 가장 적나라하게 유럽과 영미권에 대한 동아시아의 열등감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송두율은 동도서기를 넘어서는 道器合一을 제안한 바 있다. 이제 더 이상 동양과 서양을 이원화해 동양의 정신성과 서양의 기술문명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려는 문화제국주의적 논리 함정에 스스로 빠져있지 말자는 뜻이다. 이제 동과 서의 도와 기가 수평적인 관계로 만날 수 있도록 도기합일의 정신을 찾아야만 20세기의 야만적 수직관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암을 읽어내는 데 있어서도 유사한 오류가 지속적으로 양산되고 있다. 특히 도불 이후의 고암은 동양의 정신과 기법으로 서구의 시각예술에 접목해 성과를 만들어냈다는 식의 조형 방법론적 동어반복에 매어있기 십상이다. 물론 고암의 현대적인 조형적 실험들이 전통화단의 관념성을 타파해 나갔으며, 서구의 비정형(앵포르멜)회화의 영향을 받아 수묵추상의 경지를 일궜다거나, 프랑스 활동 초기에 꼴라주 기법을 받아들여 문자추상으로 이어낸 점 등 양식사적으로 동양과 서양의 방법을 넘나든 흔적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시각예술의 양식사적 기술에 근거해서는 동도서기라는 동어반복을 벗어날 수 없다는 데 있다.

고암의 삶을 집약한 그의 예술의 핵심은 '횡단의 미학'이다. 이 횡단의 미학에 주목하는 일이야말로 역사 앞에서 당당하지 못한 남한사회의 모순을 넘어서 고암의 거대한 문화적 치유의 메시지를 되살리는 일이다. 동도서기를 넘어서 도기합일의 정신으로 살아간 고암의 예술은 이렇게 남북을 오가며, 동서를 넘나들고, 역사를 가로지르는 횡단의 미학으로 인해 당대성을 획득하며 현재진행형으로 살아날 것이다. 고암 정신은 감옥 안에서도 창작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꺾이지 않는 예술의지를 통해서, 남북의 벽을 넘어 상생의 길을 예언한 ‘통일무’ 안에 있다. 익명의 군상들이 어우러져 화합과 생명을 노래한 ‘반전평화’의 메시지 안에도 그의 예술가적 통찰력과 세계사적 보편성이 살아 숨쉬고 있다.

화합과 생명의 예술의지

▲군상 ©
고암 탄생 1백주년 전이 열리는 지금 참담한 심정으로 이 점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분단이데올로기와 서구지향의 문화적 편향을 거부하며 종횡무진한 이응노를 바로 읽어낼 준비가 돼있는가. 아직도 서슬 시퍼런 냉전이데올로기가 살아있는 한 1백년 전에 태어나 우리 사회의 아픔을 안고 간 고인의 삶과 예술을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진정한 문화적 자산으로 끌어안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21세기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부끄러운 얼굴로 묻는다. 경계인임을 주장하는 송두율을 가차없이 재단하는 냉전이데올로기에 침묵으로 동의하고 있는 한국사회는 과연 20세기 한국을 관통하는 시대정신의 산물인 이응노의 예술을 오롯이 받아들여 시대의 아픔을 다스리고 앞날의 큰 이야기를 열어나가는 메시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메리카 점령군의 캐터필러에 두 여중생을 보내고도 야만적인 석유전쟁에 동조하여 이라크파병을 결정해야만 하는 한국의 현실은 동서와 남북을 훌쩍훌쩍 넘나든 고암의 횡단의 미학을 받아낼 자세가 되어있는가. 아직도 아메리카 점령군을 모시고 한반도 평화체제를 운운하면서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서 준 전시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 한반도 남단의 우리가 ‘민족에게 통일을 전세계에 평화를’ 이야기하는 고암의 이야기를 들을 자세가 돼 있는가.

김준기 / 미술평론가

필자는 현재 홍대 예술학과 박사과정 중에 있다. 기획한 전시로는 ‘건너간다’, ‘A4反戰’, ‘작업실리포트’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제2미디어시대’가 있다. 지금은 사비나미술관 학예실장과 미술인회의 운영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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