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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좌표를 폭넓게 반성하기
학문의 좌표를 폭넓게 반성하기
  • 이병창 동아대
  • 승인 2004.04.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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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지지하며: '왜 다시 우리학문' 인가

우리 것에 대한 깊은 관심은 1970년대 초 민족주의 열풍과 더불어 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많은 연구자들은 우리 역사와 문화 및 사상을 연구하고, 그 속에서 서구의 것보다 더 탁월한 것을 찾으려 했다. 그때만 해도 이런 시도는 서구이론의 단순적용에 그쳤던 것 같다. 그러나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이 등장하면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은 우리의 현실에 적합한 이론에 대한 연구로 발전했다. 당시 학문이란 ‘과학으로서 학문’ 즉 진리의 이념에 기초하면서, 이를 통해 실천적으로 민중에 복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학문에서 역사와 사회의 법칙은 보편적이며, 연구자의 일은 이를 모델로 하여 우리 현실에 적합한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기된 것이 바로 ‘우리 이론’이라는 개념이었다.

과학적 학문의 이념과 현실적 맥락

이런 맥락에서 탄생한 1980년대 ‘우리 이론’의 개념은 다른 한편 당시 주류 학계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었다. 당시 주류학계는 외국의 이론을 소개하는데 급급했으며, 그 현실 적합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더구나 그들은 아카데미즘에 안주하면서 민중의 절박한 요구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이론’이라는 개념은 이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면서 이론의 현실 적합성과 학자의 사회적 책임의식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 결과 아카데믹한 논문에 대신하여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가 고양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1980년대 우리 이론의 연구가 적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 평가된다. 무엇보다도 1980년대 민중민주주의라는 이론은 한 시대를 넉넉히 담았고 전체 민주화 운동을 지탱할 수 있었던 우리 이론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우리 이론’ 개념의 전제가 되었던 과학적 학문의 이념 자체가 무너진 듯 보인다. 이는 무엇보다도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담론으로서의 학문’ 개념이 등장했던 것이 결정적 원인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런 이념에 기초한 우리 이론의 연구조차 한계가 있었다. 즉 지나친 보편주의로 서구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리고 학문의 객관성보다 당파성이 강조됐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연구자들에게 더 이상 어떤 총체적 학문 개념은 사라졌다. 각자는 자기의 학문에 대해 다양한 이념과 방법론,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다양성은 한편으로는 그만큼 우리 학문의 세계가 풍성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게 생각된다. 그러나 적지 않은 문제점이 여기서 다시 드러난다. 이제 연구자들은 자기 학문의 학문성에 대한 어떤 성찰도 포기해 버리고 마치 전문기술자처럼 연구논문을 찍어낸다. 결과적으로 각 학문의 세계는 겉으로는 분주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무언가 텅 비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더구나 안타깝게도 과거의 악습이 재생된 게 아닐까 우려된다. 많은 연구자들은 연구비를 얻기 위해 글을 쓰며 그래서 전문가들끼리 돌려보는 아카데믹한 논문 체제로 되돌아갔다. 또한 외국이론의 무분별한 도입이 학자로서의 존재이유라도 되는 듯이 학문적 연구의 중심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이제 와서 어떤 총체적 학문 개념을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이런 문제점을 그대로 방임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우리 학문’이라는 개념을 되살려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현실에 대한 적합성이란 학문의 성립에서 절대적 기초는 아니더라도 매우 주요한 좌표축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학문성'에 대한 깊이있는 철학적 성찰 요구

물론 1980년대 우리 이론의 문제점을 충분히 이해한 위에서, 한층 더 높은 차원에서 이 개념을 되살려야 한다. 우선 이 개념을 과학으로서 학문의 이념으로부터 추상해 독립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 학문의 다양한 시도들에 대해 그 상대적 가치를 인정해 줄 수 있겠다. 그에 못지않게 주요한 것은 이제 서구 이론을 적용하거나 우리의 이론을 찾는 것을 넘어서서 우리의 고유한 학문을 만들어내는 단계로 전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서구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심지어 동서양 학문의 경계까지 넘어서는 학문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우리 학문’의 시도는 학문의 학문성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서구학문이 들어온 지 1백년이 넘은 지금 ‘우리 학문’의 개념이 아니더라도, 우리 학문의 전반적 좌표를 폭넓게 반성하는 것만큼 긴박한 일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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