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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 사람이 살고 있어요
지하철에 사람이 살고 있어요
  • 김희철
  • 승인 2020.10.02 10: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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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2호선 세입자' 온라인 공연 후기

지하철에 사는 세입자 다섯 명
가정집이라 우기며 나가길 거부

비정규직·임대료 문제와 같은
한국 사회 고질적 병폐 다뤄
연극 <지하철 2호선>의 한 장면. 출처 : 성남문화재단 블로그

“이번 역은 우리 역의 종착역인 신도림역입니다. 취~ 스크린 도어가 열립니다.” 지하철을 타본 사람이라면 익숙한 사운드가 무대를 연다. 고시원에 사는 청년 ‘이호선’은 지하철 공사 입사 면접에 최종 합격해 취업에 성공한다. 그의 아버지도 지하철 기관사였다. 아버지를 뒤이어 어릴 때부터 원하던 직업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정직원은 아니고 인턴 신세. 사귀던 여자친구는 비정규직으로 취업한 이호선에게 실망하고 떠나버린다.

발명왕 에디슨의 제자이자 영화 편집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에드윈 포터’의 작품 <대열차 강도>의 화면처럼 지하철 2호선 차량 내부가 무대에 설치됐다. 당연히 한쪽 벽만 설치됐지만 지하철 노선도, 광고물, 의자, 소화기, 손잡이 등 2호선 내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꼼꼼하고 사실감 있게 마련된 무대다. 공연의 온라인 중계 카메라는 전체를 보여주는 풀 샷이 아니라 클로즈업, 미디엄 샷 등 영화적 사이즈로 무대 위 인물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시점샷 같은 장면이 나오는 영화처럼 입체적이지는 않지만 인물들의 쉴 틈 없는 대사와 행동들이 이야기를 몰입감 있게 전개한다.  

피곤함에 쩔어 깊은 잠에 빠진 이호선은 차고지에서 잠이 깬다. 그런데 아무도 없어야 할 그곳에서 인기척을 느낀다. 승객석 밑에서 사람이 튀어나오고 천장에서도 나온다. 지하철에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직업의식 투철한 역무원 이호선은 ‘특정 개인이 점유할 수 없는 공공장소’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 퇴거를 요구한다. 하지만 점유자들은 이곳이 자신들의 ‘엄연한 가정집’이라고 우기며 나가기를 거부한다. 이호선은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집요하게 찾아온다.  

이 다섯 명의 이름은 지하철 2호선의 역명이다. 술 주정에 폭력까지 행사하는 남편을 피해 지하철에서 살게 된 중년 여성 ‘방배’는 지하철에서 팔토시 같은 물건을 팔아 돈을 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역삼’은 가끔 숨겨둔 막걸리를 꺼내 마신다. 매일 밤 잠실나루(구 성내)역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젊은 여성 ‘성내’는 이름처럼 까칠한 성격을 가졌다. 전단지 알바를 하며 만화가를 지망하는 가출 소년 ‘홍대’는 힙합 가수, 영화감독이 되려고 하다가 결국 요리학원에 다니며 요리사가 되기로 한다. 세입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구의‘는 서울 광진구 자양동에 엄연히 집이 있지만 치매가 있어 돌아갈 수 없다. 서로 아버지를 못 모신다는 자식들에게 버림받아 생긴 상처일 것이다.  
역무원 이호선은 이 다섯 점유자들을 어떻게든 내보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정규직 전환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 이호선은 이들의 고민 상담을 해주겠다면서 지하철에서의 거주 중단을 회유한다. 저마다의 사연과 상처를 갖고 지하철에까지 오게 된 다섯 명은 누구인지도 모르는 주인에게 월세로 1인당 10만 원을 낸다. 이들 다섯 명은 지하철이라는 공간이 살기엔 불편해도 마음은 편하다고 한다. 모두에게 열린 공간을 불법 점유한 이들이 죄인인가, 이들에게 월세를 받아 용돈을 버는 누군가가 죄인인가?

연극 <지하철 2호선>의 한 장면. 출처 : 성남문화재단 블로그

정직원이지만 기러기 아빠로 살아가는 역장은 세입자들을 사회 낙오자로 치부하며 이호선에게 정직원이 되려면 관행에 따르라고 강요한다. 세입자들에게서 월세를 받고 있는 사람의 정체를 알게 된 이호선은 ’시청‘이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세입자들과 비빔밥을 함께 먹을 정도로 친해진다. 사연 많고 인정 많은 이 지하철 세입자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술주정뱅이 남편에 시달리던 ’방배‘는 좋은 새 짝을 만날 수 있을까? 막걸리파 ’역삼‘은 몇 년간 준비해온 공무원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까? 노인 ‘구의’는 자식들 손주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홍대’는 멋진 요리사가 될 수 있을까? ‘성내’는 사고로 떠났던 누군가를 잊고 죄책감을 씻어낼 수 있을까? 비정규직 역무원 이호선은 그토록 원하던 정규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연극 <2호선 세입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 임대료 문제 등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들을 심각하지 않게 다루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다. 포털 사이트에서 온라인 공연으로 진행된 <2호선 세입자>는 무관중 공연이라 관객의 웃음소리나 박수 소리가 없었다. 함성이나 응원 없는 경기장에서 기량을 펼쳐야 하는 스포츠 선수들처럼 무관중 공연을 해야 하는 배우들의 고역이 느껴진다. 

다른 지하철들과는 다르게 서울을 원형으로 순환하는 지하철 2호선은 가끔 지상으로도 다닌다. 한강 다리도 건너며 지친 서울시민들에게 움직이는 풍경화를 제공한다. 마스크를 쓰는 문제로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각종 실랑이가 일어난다고 한다.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고통과 손해를 최대한 줄이며 모두가 힘든 이 시간의 터널을 통과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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