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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체제 변동과 한국의 노사관계
노동체제 변동과 한국의 노사관계
  • 임영일 경남대
  • 승인 2004.04.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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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사회을 위한 학술아젠다(3): 사회통합적 노사관계

임영일/ 경남대 사회학


노동통제, 노동시장, 노동운동의 복합으로 구성되는 노동체제는 자본주의 축적체제의 변화, 그리고 정치체제의 변화의 영향 속에서 단계적 형성과 해체의 과정을 겪는다. 198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고 있었던 한국의 억압적 국가조합주의 노동체제는 (주변부)포드주의적 축적체제 및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와 맞물려 있었다. 이 노동체제는 1980년대 말과 90년대 초에 걸쳐 급격히 해체됐는데, 포드주의적 축적체제의 위기와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이 그 배경이 됐다면, 노동체제 내부에서는 무엇보다도 1987년의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극적으로 진행된 한국 노동운동의 급성장이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었다. 기존의 노동체제 해체 이후 한국의 노동체제가 어떤 성격의 것으로 변화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합의된 견해가 없고, 단지 잠정적으로 ‘1987년 노동체제’라는 잠정적인 개념으로 이를 부르고 있을 뿐이다.

1997-98년 IMF 경제위기, 그리고 이를 계기로 급격히 진행되고 있는 시장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여파 속에서, 낮은 제도화와 높은 갈등의 노사관계로 특징지어졌던 과도기적인 ‘1987년 노동체제’의 진화 방향을 둘러싼 갈등이 첨예하게 진행되고 있다. 정부와 재계, 그리고 보수적인 제도 정당들과 보수언론 등 범 자본 세력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추세를 마치 역사필연적인 과정인양 호도하면서, ‘경쟁력’ 강화를 위한 협력적 노사관계, 협조주의적 노동운동을 한목소리로 강조한다. 현 정부가 말하는 ‘사회통합적 노사관계’ 역시 이런 신자유주의적, 시장 자유주의적 노사관계를 수사학적으로 포장하는 용어이다. 노동운동 내에서도 ‘사회통합적 노동운동’을 운위하면서 이와 내응하는 세력이 존재하지만, 지난 수년 동안 ‘시장’의 쓴 맛을 호되게 경험하고 있는 노동자들, 그리고 1987년 이후 성장한 민주노동운동의 주류는 이를 거부하고 힘겨운 투쟁을 다시 전개하고 있다. 향후 한국의 새로운 노동체제의 형성은 현재 진행 중인 이 투쟁의 결과에 의해 크게 좌우될 것이다.

억압적 국가조합주의 노동체제를 해체하고 과도기적으로 형성된 ‘1987년 노동체제’는 낮은 수준의 제도화를 그 중요한 특징으로 한다. 이 노동체제 하에서 노사관계의 제도화는 다만 기업 혹은 작업장 수준에서만 제도화되고 있었을 뿐, 사회적 수준과 정치적 수준에서의 제도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노사간의 단체교섭은 기업과 작업장 수준, 그것도 전체 노동자의 12% 정도만을 포괄하는 조직 부문에만 국한된 것이다. 만일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라고 하는 것이 그 본연의 의미에서 성립할 수 있으려면, 노사간의 단체교섭은 기업 수준을 넘어서서 사회적, 정치적 수준으로까지 확장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조합이 기업별노조가 아니라 산별노조로 조직전환을 하고, 사용자들이 이에 상응하는 사용자단체를 구성하며, 교섭과 투쟁의 노사관계는 기업 수준을 넘어서서 이 사회적 수준에서 진행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고용상태와 상관없이 해당 산업분야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임금과 근로조건의 기준이 사회적 차원에서 형성돼야 할 것이다. 만일 ‘노사정위원회’가 전국적, 정치적 수준에서의 노사관계를 제도화하기 위한 ‘사회협약(=정치협약)’의 기구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 협약의 내용을 실질적으로 담보하기 위한 하부구조로서의 산별교섭, 산별협약의 제도화를 먼저 추진해야만 할 것이다.

현재 한국의 노동조합은 수십년 동안 체질화되어 있었던 기업별노조, 기업별교섭의 구조에서 벗어나 산별노조로 조직전환을 하고 사용자들에게 산별교섭에 응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투쟁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사용자들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고, 한국의 정부는 이미 형해화된 ‘노사정위원회’만을 붙들고 있을 뿐 이 문제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으며, 한국의 보수 정치세력들은 이것이 무슨 문제인지를 아예 모른다. 한국의 새로운 노동체제 형성이 결국 범 노동세력과 범 자본세력간의 투쟁의 결과에 의해 방향이 잡힐 수밖에 없다고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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