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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대등성' 위해 정치적 난제부터 풀어야
'관계의 대등성' 위해 정치적 난제부터 풀어야
  • 고세훈 고려대
  • 승인 2004.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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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사회를 위한 학술아젠다: (3)사회통합적 노사관계

참여정부는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라는 이름 아래 사회적 파트너십의 형성과 이중적인 노동시장의 완화를 약속했지만, 현실화시키는 과정은 그리 수훨치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는 일종의 딜레마다. 그러나 대립과 마찰을 상징해 왔던 노사관계가 사회통합의 한 요소로 파악하는 것 자체가, 노동문제를 보는 시각의 변화를 담지 하고 있는 셈이다. '왜' 그리고 '어떻게' 한국형 사회통합적 노사모델을 구상할 수 있을까, 논의 촉발을 위한 단초를 제시했다.

고세훈 고려대 행정학

한 때 ‘대안은 없다!’고 큰소리치던 시장에 대한 불신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그런데도 정치를 매개로 시장을 간섭했던 복지국가, 케인즈주의, 코포라티즘 등은 ‘담론적’ 회생의 기미조차 아득하니, 과연 시장은 그 자체로 얼마나 막강한 권력현상인가를 새삼스럽게 확인한다. 이제 자본주의의 문제는 시장 아닌 기업의 그것으로 축소되고 노사문제야말로 가장 첨예한 최전선의 갈등현장으로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노사관계란 실은 이미 기업내부에 존재하는 권력관계의 반영 내지는 소산에 불과하다는 엄연한 사실을 다시 환기할 필요가 있다. 모든 관계가 대체로 그렇듯이, 노사관계도 당사자 간의 권력배분 양상에 따라 그 대강의 틀이 정해지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한국처럼 시장적 권력배분이 극단적으로 불균등한 상황 속에서 진정한 ‘화합형’ 노사관계의 틀을 염원한다는 것은, 특히 사용자 편에서 보면, 얼마나 순진한(혹은 발칙한) 발상인가. 우리는 네덜란드형 모델 같은 제안들조차 실험은커녕 변변히 논의되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매도당하는 현실을 살고 있거니와, 우리는 바람직한 노사관계의 모형을 모색하기 이전에, 그것을 위한 환경적 여건을 먼저 마련해야 하는, 즉 바람직한 노사관계의 형성을 위해 노사관계의 틀을 벗어나서 사고해야 하는 역설적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할 것인가.

학제간 영역으로 논의 확산해야

시작은, 관계의 대등성이란 오로지 권력자원에 의해서 뒷받침되며, 권력이란, 특히 노동의 권력이란 수와 조직이 주는 연대의 힘에서 나온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인식하는 일이다. 노동운동의 불가피한 쇠락이 현실과 이론의 양 편에서 간단없이 운위되는 시절이지만, 시장안팎에서 시장으로부터 소외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노동은 여전히 삶의 중심적 테마일 수밖에 없고, 연대와 동원은 노동의 이름으로 행해질 때 가장 효과적이다. 물론 이 때의 노동은 고용여부와 관계없이 시장에서 사실상 배제된 모든 계층을 포괄하는 광의로 정의돼야 할 터인데, 당연히 연대의 기준도 어떤 선험적 이론이나 이념이 아닌 사회경제적 지위의 문제로 귀착돼야 한다. 원래 권력의 수직적 위계문제에 관심이 있는 노동운동은, 언어, 인종, 종교와 같은 원초적 인간정서에 기대 적대적 타자를 불러내는 수평적 분화요인들 보다 도덕적 정당성에서 우월하다. 노사관계에 대한 일체의 논의는 권력자원의 기초로서 노동의 연대를 모색하는 일을 강구하는 데서 시작돼야 한다.

또한 노사문제는 재벌개혁 혹은 기업지배/소유구조의 개편 작업과 맞물려 있다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 예컨대, 우리의 모색이 소유경영형 지배구조를 그대로 추인하거나, 주주자본주의의 양상을 부동의 이상형으로 간주하는 한, 진정한 의미의 통합적 노사관계는 물 건너 간 것과 다름없다. 기업지배구조란 이미 그 자체가 노사관계의 일정한 모형을 함의하거나 강제하는 권력적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기업지배구조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가 경영이나 경제학 분야에 국한돼서 전개돼온 경향은 마땅히 지양돼야 하며 본격적인 학제적 논의가 시급하다. 예컨대, 기업지배의 문제를 권력관계에서 심대한 불균형을 노정하는 시장에 맡길 수 없다면, 그리하여 민주정부의 정치적 결단에 의한 법제적 조치가 불가피하다면, 정치학과 법학 등 분야로 논의가 확대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노동에 대한 법적 통제가 가능했다면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제도화가 불가능할 이유는 없으며, 기업이라고 해서 민주적 입법의 영향력 밖에 위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노사문제 제대로 접근할 수 있는 정치적 조건 미흡

무엇보다 우리의 가장 큰 비극은 노사문제를 접근할 수 있는 정치적 조건이 마련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노동이 시장 보다 數가 지배하는 정치를 선호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로되, 역사적으로도 노동은 시장적 권리를 획득/보호/확대하거나 국가복지와 같은 보다 직접적인 과실을 얻기 위해 부단히 정치화를 지향해 왔다. 노동이 본래적으로 정치적이라면, 한국처럼 노조운동의 전통이 일천하고 그 권력자원이 극도로 핍진한 경우는 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 이런 점에서 시민사회의 노동에 대한 태도가 경멸 내지는 반공색깔론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은 노동의 실질적 정치화 전망을 암담하게 만든다. 작금의 탄핵정국이 다시금 확인시켰듯이, 정치판이 우연적 요인에 의해 좌우될수록 노동정치의 활로를 찾는 일은 그만큼 어려워진다. 예컨대, 열린우리당(입만 열면 진보를 외치면서도 비이념과 비노선을 스스로 광고하는 이 적나라한 당명을 보라)의 태생과정과 그간의 행태를 볼 때, 그것이 탄핵정국이라는 돌발상황을 등에 업고 다수당이 된다 한들, 그러한 결과가 과연 ‘노동없는 정치’를 여하히 채워나갈지, 요원하기는 마찬가지다. 더욱이 노동의 실질적 정치세력화란 어차피 중장기적 과제인데 반해, 정치개혁이나 재벌개혁과 같은 산적한 정치적 난제들을 대등한 노사관계의 정립을 위해 모두가 시급한 사안들이다.

그러나 희망의 조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만시지탄이나 이번 총선에서 실험될 정당명부제는 노동대표의 중앙정치로의 진출의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할 수 있으며, 노동정치에 관한 한, 시작은 정말 반이다. 그와 더불어 시민사회의 정치적 각성도 그만큼 빨라질 것이다. 학계와 노동계도, 예컨대, 정당명부제가 보다 명실상부한 민주성을 담보하도록 전략적 중지를 모으고 결집된 중지를 운동으로 전환하도록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노사관계에 내재된 권력적 속성을 이해해야 한다. 통합과 평화를 위한 노사관계도 권력적 긴장과 길항의 산물이다. 특히 한국의 노사관계가 시장적 권력의 과도한 비대칭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정치적 해결을 또한 전제하는 바, 그것이 종종 극단적 대립으로 치닫는 이유도 노동이 기댈 정치적 활로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노동의 실질적 정치화가 가능할 때까지, 바람직한 노사관계를 위한 일체의 모색은 시늉에 불과할지 모른다.

필자는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영국 노동당의 국유화정책: 이념, 전개, 당내정치의 동학'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국가와 복지: 세계화 시대 복지한국의 모색'(아연출판부 刊), '복지국가의 이해: 이론과 사례(고려대학교출판부 刊), '영국노동당사'(나남출판 刊)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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