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絶筆의 사회학: 지식인 절필의 유형과 계보
絶筆의 사회학: 지식인 절필의 유형과 계보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4.04.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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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침묵'도 필요하다…자기성찰의 시간으로

문자가 유력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인 사회에서 글쓰기는 자기표현의 최우선 수단이다. 이는 지식인일수록 그렇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절필'을 선언하는 지식인들이 있어왔다. 식민지와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탄압에 대한 저항과 굴종으로써 자발적, 타율적 절필들이 이어져왔다. 물론 시대와의 불화가 절필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글이라는 것도 일종의 발효식품인지라 내부의 공허함에 견디다못해 자기한계를 외치는 경우도 많다. 이때의 절필은 자신에 대한 환멸의 표현일수도 있고, 내실있는 글쓰기를 위한 '의도적 절연'일 수도 있다.

그 이유야 어떻든 절필은 상당히 독특한 문화행위라 할 수 있다. '절필'만큼 강렬하게 사회적 상황을 표현하는 아이콘도 드물 것이고, 그만큼 실존적인 자아의 결단도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한국사회는 절필을 통해 어떤 문화적 흐름을 이루어왔고, 또한 그 속에서 어떤 의미망들을 생산해냈을까.

노진철 경북대 교수(사회학)는 절필이 한국의 고유한 문화현상이라고 말한다. "서구에서는 절필로 저항하지 않는다. 언술행위 차원에서 절필이 사회적 표현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반면 유교사회에서는 지식인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절필은 종종 지식인들이 도덕성을 유지하기 위한 보루로 여겨져왔다"라는 설명이다.

일제 때는 '일어로 창작하거나', '천황찬양'을 강요받으면서 절필하는 문인들이 많았다. 이태준이나 박화성 같은 소설가가 대표적이다. '사하촌'의 작가 김정한은 절필작가로 유명한데 최근 박태일 경남대 교수(국문학)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43년 9월 '춘추'지에 친일적인 내용을 담은 희곡 '隣家誌'를 실었"다. 쓰지 않고 견디기도 어려울만큼 탄압과 강요가 심했던 시대였던 것이다.

1960∼70년대 군부정권 역시 지식인들을 백의종군하게 했다. 군사쿠데타, 유신사태, 12·12로 이어지는 공안정국에서는 글쓰는 일이 모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특히 1980년대엔 집단절필사태가 이어졌는데 소설가 신상웅, 시인 김명인, 소설가 김동리, 최인훈, 현기영, 이문구 등이 연달아 칩거에 들어갔다. 문인들의 절필이 자발적으로 이뤄졌다면, 정치사회학자 등 학자들은 강요된 절필이었다. 이런 집단절필은 정보의 독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한편이 침묵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시대의 조류를 타고 극단의 풍경을 빚어내 대중들의 눈과 귀를 현혹시켰던 것이다.

'저항'으로서의 절필이 사라진 시대

▲왼쪽부터 강준만 교수, 권성우 교수, 작가 김주영, 박범신, 박홍규 교수. ©

오늘날 '저항'으로서의 절필과 글쓰기에 대한 他殺이 거의 사라졌다. 김창룡 인제대 교수(신문방송학)는 "민주화 사회에서 절필의 메시지는 미약하다"라며 "적극적인 담론에의 참여가 더욱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또한 "사람들이 비슷비슷하게 생각하고, 특정 지식인이 발언권과 지식을 독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절필해도 대중들이 그 빈자리를 느끼지 못한다"라고 많은 이들이 입을 모은다.

하지만 '시대와의 불화'는 비판적 지식인의 숙명이다. 얼마 전 절필을 선언한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는 "이미 썩어버린 대학도 개혁하지 못하는 처지에 사회에 대고 무슨 말을 한다는 게 낯부끄럽다"라는 말로 절필을 선언했다. 여기서 우리는 집단의 윤리와 개인의 윤리 사이에 가로놓인 거대한 벽을 느낀다. 박 교수의 절필은 집단의 부조리에 무의식적으로 젖고 적응해서 살아가는 오늘날 지식인의 처지에 대한 풍자로서 충분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김영민 한일장신대 교수(철학)는 지난 2002년 "스스로가 뱉어낸 말의 業障이 너무 무거워 물러나겠다"라는 말과 함께 문필활동을 접었다. 김 교수의 경우 절필은 자기객관화의 조건이었다. "글과 이론은 결국 자폐적인 체계를 만들면서 인간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측면이 있다. 글 자체가 글을 먹어들어가는 경우다. 이럴 때는 글 바깥으로 나와서 글쓰기의 장을 멀리서 조망해봐야 한다"라고 밝힌다. 절필은 글쓰기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이런 측면을 엄격히 적용하면 절필이 없이 기계적으로 계속되는 글쓰기는 단계를 건너뛴 불안하고도 모순된 과정에 다름 아니다.

절필을 삶의 스타일과 결부시켜서 볼 수 있다. 프랑스 학자 레지스 드브레는 친매체적인 프랑스 지식인들의 범람을 두고 '지식인의 종말'을 선언했는데, 오늘날 지식인들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영향력을 확장하고 입신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것은 언론이라는 '주물'에 부어져 대량생산되는 정형화된 어떤 삶을 상기시킨다. 이런 일직선적인 삶의 형태 속에서 산출되는 글쓰기 또한 그런 삶의 지니고 있는 리스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 오늘날 문화론자들의 설명이다.

오늘날처럼 말바꾸기가 일상화된 시대도 드물었다. 그만큼 시대의 변화가 눈부신 까닭이고, 전문가들의 예측과 전망도 빗나가기 일쑤다. 김진석 인하대 교수(철학)는 "사이버공간에서의 담론처럼 글쓰기의 속도가 빠를 때 지식인들이 실패할 확률이 높아지므로 말을 절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기판단과 이론의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판단해서 상식적인 말만 늘어놓고 있을 때는 한시적 절필을 생각해봐야 한다라고 덧붙인다.

김 교수는 몇 년 전 "내가 텍스트를 너무 믿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에 1년간 글을 쓰지 않았는데, 텍스트 바깥에서 현실을 지켜보면서 중요한 성찰의 계기가 됐고, 문제의식도 좀더 현실적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 생각해볼 때 글은 '개성표출의 장'이다. 자신의 글이 다른 글과 대동소이하고 변별력이 없을 때 글쓰기의 매력은 사라진다. 그 순간을 적절히 깨닫고 '글을 끊을' 수 있는 것도 능력일 것이다.

이런 자기성찰적 절필과는 달리 '공중적 지식인'으로서의 절필 유형도 있다. 최근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는 "탄핵정국에 중간파적 입장이 설자리가 없어서 글을 그만둔다"라고 말하며 한국일보 연재를 중단했다. 강수택 경상대 교수(사회학)는 이를 두고 "담론을 통한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의심하고 중단하겠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강 교수는 "절필은 소극적 태도다. 적극적으로 합리적 토론문화를 만들어가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라고 절필의 유효성에 대해 회의하는 입장을 보였다.

지난해부터 1년 이상 글을 쉬고 있는 권성우 숙명여대 교수(국문학)는 요즘 들어 논쟁, 반론, 재반론의 기회가 많아지면서 절필을 유도한다고 본다. "그런 논쟁에 개입하다보면 상처를 입거나 쉬면서 자기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하는데, "쉬면서 타인의 글을 보고 실존을 재점검할 수 있는 소중한 개인적 기회가 된다"라고 말한다. 한국사회에서 토론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지만, 그 방법론과 질적 측면에서 문제가 많아 지식인들이 튕겨 나가는데 그 결과는 오히려 플러스알파라는 견해다.

지식인의 책무를 생각한다

언론에 보도되는 유명문인이나 스타학자의 절필선언이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는 견해도 있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철학)는 총선 때까지 글을 쓰지 않겠다는 도올 김용옥의 발언에 대해 "엔터테이너로서의 자기 인기관리에 불과하다"라며 오늘날 대중적 작가나 학자들이 자칫 절필을 도구화하는 것에 우려를 나타낸다.

지식인의 침묵은 예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됐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다만 말하는 것 그 자체가 의미있는 게 아니라 남들이 하기 꺼려하는 '영역'에서의 발화가 중요하다. 최근 "언론에 일체 글을 쓰지 않겠다고" 절필을 선언했다가 국민일보에 탄핵 관련 칼럼을 발표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박홍규 영남대 교수의 경우도 "이런 상황에서 절필하고 앉아 있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다는 판단" 때문에 돌아왔다. 여기서 보듯 절필을 절대화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박 교수는 국민일보 칼럼 이후 다시 절필상황으로 돌아갔다.

시인 기형도는 "죽어있는 잎들을 매달고 있는 저 나뭇가지는 추악하다"라고 노래한 바가 있다. 말이 더 이상 참다운 소통의 채널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사회혼탁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이런 시대에 좀더 신중한 글쓰기를 위해, 자기만족이 아니라 타인을 지향하는 글을 위해, 획일적이고 직선적인 삶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여유의 삶을 위해서 '절필'을 선언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듯하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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