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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숙의 숨겨진 그림 이야기] 빛이 되는 사람, 의사
[박희숙의 숨겨진 그림 이야기] 빛이 되는 사람, 의사
  • 박희숙
  • 승인 2020.08.24 10: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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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1632년, 캔버스에 유채, 169*216, 헤이그 마우리치호이스 미술관 소장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1632년, 캔버스에 유채, 169*216, 헤이그 마우리치호이스 미술관 소장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 가장 애를 쓰는 사람들이 의료진이다. 의료인으로서의 사명감과 희생정신이 없었다면 인류에 더 큰 재앙이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치료법조차 개발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염병의 감염 위험 속에서 묵묵히 치료에 전념하고 있는 의료진의 노고가 참 감사하게 느껴지는 시기다.  

히포크라테스 이후 의사들은 오래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질병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해왔으며 의학의 발전은 어느 한 사람의 노력보다는 여러 세대에 걸쳐 이뤄졌다. 

열악한 환경과 정보의 부재 속에서도 의사들은 수많은 실패를 거듭해왔으며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의학이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의사들의 노력과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같이 인간의 수명이 연장되지 않을 것이다. 

의학의 기초는 해부학에서부터 나온다. 해부학에 대한 관심은 고대인들도 많았다. 기원전 1600년경에 작성된 ‘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에 묘사된 심정과 혈관 등 장기들에 내용에 기록되어 있는 이집트 파피루스가 최초의 기록 자료가 남아 있다.

그 이후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가 그리스에서 해부학 교육을 시작했으며 그의 저서에 ‘사람의 몸 자체가 의과학의 시작이다’라고 밝혔다. 

의사뿐만 아니라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등 르네상스 시대부터 인체 묘사를 정확하게 해야 하는 화가들에게 해부학은 매력적인 학문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해부학 책을 저술하였으나 워낙 다양한 분양에 관심에 많았던 다빈치답게 책을 완성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다빈치의 인체 드로잉을 보면 해부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처음으로 해부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해부학은 그 이후 발전을 거듭해와 인간이 질병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던 계기를 만들어 준다. 

인체를 해부하고 있는 의사를 그린 작품이 렘브란트의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다. 이 작품은 당시 행정관이자 유명한 외과 의사 튈프 교수가 1632년 1월, 강의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해부학 극장에서 공개 강의를 묘사하고 있다. 

해부학에 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7세기 초부터다. 또한 17세기 초에 해부학 강의는 유럽에서 인기 있는 강좌였다. 의사들뿐만 아니라 대중들까지 해부학 강의를 들을 정도였다. 해부학 공개 강의는 창조주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일반적인 행사였다. 

해부학은 의사들뿐만 아니라 화가에게도 인체를 연구하기 위해 중요한 행사였으며 르네상스 시대에도 비공식적으로 시체를 해부하는 의사들의 모습을 기록하기 위해 화가들이 해부학 실험에 참가하기도 했다.

렘브란트는 이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직접 해부학 강의를 들었고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다. 

렘브란트는 고향 레이덴에서는 알아주는 화가였지만 전국적으로 명성이 있는 화가가 되고 싶어 대도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다. 

암스테르담에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명의 렘브란트였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본 화상 윌렌보르흐가 당시 유명한 40세의 튈프 교수가 수행하는 해부학 강의를 그려 달라고 의뢰한다. 

이 작품에 중요 모델인 니콜라스 튈프는 암스테르담 의과대학 외과의 조합의 회장으로 팔 근육의 해부가 특기였다. 그는 당시 ‘암스테르담의 베살리우스’라고 불렸다. <베살리우스(1514~1564, 근대 해부학의 창시자):최초로 손의 근육과 힘줄을 해부한 의사>

튈프 교수는 시체의 왼쪽 팔을 절개하여 핀셋으로 힘줄 몇 가닥을 집어 보여주고 있다. 렘브란트는 튈프 교수가 근육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시체의 팔뚝을 절개하는 순간을 포착해 표현했다. 하지만 해부학적인 관점에서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강의를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렘브란트는 이 집단의 중심인물이었던 튈프 교수를 강조하기 위해 튈프 교수를 큰 모자에 팔걸이 의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해 다른 사람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튈프 교수는 초상화를 의뢰하면서 자신의 지명도나 학식을 잘 표현해주기를 원했으며 초상화 대금을 전부 지불했다.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이러한 작품은 네덜란드 초상화의 특징으로 집단 초상화라고 불리면서 초상화 비용은 공동으로 지불하는 방식이다.

외과의사 길드의 회원 7명의 인물들을 시체 주변에 모여 튈프 교수의 강의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강의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 해부용 시체를 들여다보는 사람, 강의 내용과 책과 비교하고 있는 사람, 참가 의사들의 명단을 들고 있는 사람 등 7명의 인물들을 각각 생생하게 표현했다. 강의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7명의 인물들을 렘브란트는 실제의 용모와 닮게 그렸다. 

렘브란트는 의심이 많은 사람, 강의에 관심이 없고 주변에만 신경 쓰는 사람 등등 인물들의 표정으로 강의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실적으로 묘사된 화면 중앙에 있는 시체는 범죄자 아드리안이다. 부랑자였던 그는 처형된 후 의학 대학 해부용으로 기증되었는데 당시에는 범죄자들이 해부용으로 강제적으로 사용되었다. 그 이후 1832년 영국에서 해부법이 통과되면서 해부학 연구를 위해 합법적으로 시신을 기증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작품에서 아드리안은 ‘죽음은 모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멘리토 모리-즉 서양화에서 죽은 사람이나 해골은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의미를 상징한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화면 오른쪽 앞에 펼쳐진 책은 해부학 책이다. 17세기 이후부터 유럽의 의과대학에 인체 해부가 주요 과목으로 등장하게 된다.

렘브란트 반 레인 <1606~1669>는 외과 의사 길드 회원들 기대에 맞게 8명의 반신 초상화를 한데 모아 집단 초상화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그가 처음 그린 집단 초상화지만 작품을 제작하면서 전통적인 기법에 따르지 않았다. 각각의 인물들의 특징을 잘 나타내준 이 작품으로 렘브란트는 20대에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상처'-1750년경, 캔버스에 유채, 101*128,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소장
'상처'-1750년경, 캔버스에 유채, 101*128,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소장

17세기 이후 시대가 발달하면서 시체 해부를 공개하던 방식이 사라지고 해부학은 의과대학에서 기초학문으로 역할을 하게 된다. 

의사들의 끊임없는 탐구 정신은 과학의 발전을 가져왔는데 컴퓨터의 발달과 더불어 오늘날 상상 이상으로 놀라울 정도로 의학의 혁명을 가져왔다. 컴퓨터와 의학의 결합은 100년 동안 이루어 냈던 의학의 발전 속도를 획기적으로 앞당기게 한 계기가 되었다. 

컴퓨터와 의학의 결합은 영상을 통해 의사나 환자 스스로 질병을 확인할 수 있게 만들기도 했으며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질병들의 원인을 밝혀내기도 했다. 

하지만 수많은 검사, 영상으로 병의 진행 상태를 알 수 있다고 해도 치료하는데 의사의 판단에 제일 중요하다. 따라서 시대를 불문하고 의사의 검진은 환자를 치료하는데 가장 중요한 일이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다. 

환자를 검진하고 있는 의사를 그린 작품이 가스파레 트라베르시의 <상처>다.

청색의 조끼를 입은 남자가 상처가 난 엉덩이를 보여주기 위해 양손으로 흰색의 셔츠를 가슴 쪽으로 끌어당기며 고통스러워하고 있고 붉은색 옷을 입은 의사는 상처를 보고 있다.

화면 오른쪽 고통스러워하는 남자 옆에 있는 여자는 손으로 남자의 얼굴을 감싸면서 바라보고 있고 의사 뒤에 있는 남자는 작은 양사용 그릇에 약을 빻고 있으면서도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환자 뒤에는 노인이 한 손으로는 눈물을 닦고 서 있다.

남자의 푸른색 조끼의 금장의 단추와 흰색의 셔츠는 남자가 부르주아라는 것을 나타낸다. 당시 흰색의 셔츠는 부르주아 패션이었다. 흰색의 셔츠는 세탁부가 비누로 빨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사가 두 손으로 남자의 셔츠를 살짝 들어 올리고 있는 것은 환자의 상처를 잘 보기 위해서라는 것을 나타내며 손가락으로 셔츠의 끝을 잡고 있는 것은 환자에 대한 배려를 의미한다. 의사의 이마의 주름과 눈썹은 환자의 상처를 집중해서 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남자의 치켜뜬 눈과 벌어진 입은 고통스럽다는 것을 나타내며 옆에 서 있는 여자가 두 손으로 남자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것은 환자를 달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여자의 황금색 드레스는 환자의 아내를 나타낸다. 당시 황금색 드레스는 웨딩드레스를 의미한다. 흰색의 웨딩드레스는 19세기 이후 등장했다. 

뒤에 눈물을 닦고 있는 노인은 환자의 아버지를 나타내며 왼손이 위를 향해 뻗고 있는 자세는 아들의 고통을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릇에 약을 빻고 있는 남자는 약사를 나타내며 그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환자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가스파레 트라베르시<1732_1769>는 이 작품을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부르주아도 빈민가의 사람들과 똑같이 상처를 입으면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을 보여주자 했다.  

전염병이 덮친 요즘은 누구나 다 어렵다. 하지만 재택근무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의료진들이다. 의학이 발달했다고 해도 의료진의 손길에 의해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의 희망이자 빛이다. 그들의 노고에 전 국민이 감사한 마음이다. 

박희숙 화가, 전 강릉대 교수.
박희숙 화가, 전 강릉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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