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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철주의 미술놀이 ‘외화내빈(外華內彬)’ 5] 개는 왜 달을 보고 짖는가
[손철주의 미술놀이 ‘외화내빈(外華內彬)’ 5] 개는 왜 달을 보고 짖는가
  • 교수신문
  • 승인 2020.08.19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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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미로, ‘달을 보고 짖는 개’, 1926년, 캔버스에 유채, 73×92.1㎝,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 소장, 미로는 카탈루냐의 풍토적 기호와 어린애다운 상징을 즐겁게 꾸며낸다.
후안 미로, ‘달을 보고 짖는 개’, 1926년, 캔버스에 유채, 73×92.1㎝,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 소장, 미로는 카탈루냐의 풍토적 기호와 어린애다운 상징을 즐겁게 꾸며낸다.

고향 바르셀로나에 비빌 언덕 놔두고 서릿발 치는 파리로 넘어온 청년 후안 미로는 객고의 서러움을 씹으며 주린 배를 달랬다. 설움은 요기가 안 된다. 이웃에 초현실주의 화가 동료인 막스 에른스트와 르네 마그리트, 장 아르프가 살았고, 맘씨 곱살한 시인 폴 엘뤼아르도 자주 오갔지만 수줍은 미로는 좀체 손 벌릴 줄 몰랐다. 먹을거리는 버터 두어 토막에 무 쪼가리가 고작, 말린 무화과는 운 좋은 날의 덤이었다.

서른 갓 넘긴 체수여도 배고픈 날이 꼬리 물면 헛것이 공중에 어른거린다. 작업실 벽을 퀭한 눈으로 쳐다보던 미로는 까무룩 환각에 빠졌다. 넋이 나간 머릿속에서 허깨비들이 춤추었다. 그는 천생 화가다. 쓰잘머리 없는 환영을 거저 내버리지 않았다. 종이나 캔버스에 죄다 옮겨 그렸다. 그게 1925년 무렵, 미로의 야심적 브랜드 ‘꿈의 회화’는 굶주린 가운데 웃프게 피어났다.

미로의 ‘꿈의 회화’ 한 점을 고른다. ‘달을 보고 짖는 개’는 헤식은 웃음이 터진다. 소재는 단출하되 구성이 야무지다. 미로의 투식(套式)인 과도한 생략이나 알쏭달쏭한 기호가 없다. 꿈을 그린 회화지만 무화과 먹고는 이런 꿈 못 꾼다. 미로는 이날 훈제 청어라도 드셨겠다. 여윈잠에서 깼지만 환상이 영글었다. 미로의 붓질은 아슴아슴한 연상을 부른다. 만화 같은 짜임새 안쪽은 밤이 깊다. 하늘에 조각달이 떠 있고, 땅에서 개가 컹컹 짖는다. 왼쪽에 사다리가 죽 뻗어 올라가고, 날던 새가 꼭대기에 앉을락 말락 한다.

밤하늘에 뜬 달과 높이 오르는 사다리, 뒤따라온 개를 보노라니, 어떤가. 나는 불현듯 옛적 동요가 떠오른다. 윤석중 선생이 지은 그 다정한 노랫말이 입에서 하마 맴돈다. ‘아가야 나오너라, 달맞이 가자… 검둥개야 너도 가자, 냇가로 가자.’ 그리고 하나 더. ‘얘들아 오너라, 달 따러 가자… 장대로 달을 따서 망태에 담자.’ 머나먼 카탈루냐 화가가 우리 창작동요를 들었을 리 만무하다. 하여도 공교롭지 않은가. 달 따는 장대 대신 사다리에 올라가고, 검둥개 아니라도 알록달록한 개와 더불어 달마중하는 정경들은 아예 딴판이 아니다. 동심의 숨결이 마주치면 데칼코마니가 된다.

사다리와 새는 미로의 강박적 상징으로 호가 났다. 초기작부터 심심찮게 나온 복선인데 사다리는 ‘탈출’, 새는 ‘초월’로 흔히 되새긴다. 고향 풍정을 그린 ‘농장’이란 작품에도 사다리에 앉은 새가 등장한다. ‘농장’은 궁티 나던 미로가 딱해서 소설가 헤밍웨이가 매입해준 바람에 더 유명세를 떨쳤다(이 그림은 오래도록 헤밍웨이 집안이 자랑스레 간직해왔다). 타관바치 미로는 밉보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 궁금증은 새와 사다리가 아니다. 좀 엉뚱한 데 있다. 도대체 개는 왜 달을 보고 짖는가? ‘달 보고 짖는 개’는 대수롭잖거나 부질없는 짓거리를 빗대는 상투적인 속담이다. 미로의 고향 개는 똑 부러지는 이유가 있다는 건가. 화가의 꿈에 시비 거는 게 아니다. 그의 작의(作意)가 미심쩍어서다. 누구는 귀띔한답시고 거든다. 해가 아니라 달이 개를 짖게 한다고. 농지거리로 반론하자면 대거리야 쉽다.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치자. 역사 앞에서 입 다물다가 신화를 만나자마자 짖는다면 글쎄, 개의 흥감을 너무 존중하는 변명 아닌가.

흰소리는 거두고, 전문가의 분석이나 수소문해보자. 이 작품을 소장한 필라델피아 미술관 측의 설명을 찾아보니, 참 어이없다. 미술관 누리집에 써놓기를 ‘내려다보던 달은 ‘이봐, 너 따윈 관심 없어(You know, I don’t give a damn)’라 하고 개는 컹컹 짖는다’고 해놨다. 그 글 앞에 ‘카탈루냐의 설화에 바탕을 둔’ 어쩌고 하는 대목까지는 좋은데 뜬금없이 달이 잔소리를 내뱉는다니…. 하기야 미로가 처음 스케치할 때는 이런 헤픈 말장난이 들어있긴 했다. 나중 유화로 그릴 때는 빼버렸다.

다른 미술관 큐레이터의 코멘트도 추려본다. ‘카탈루냐 풍경에 대한 기억을 반추하면서 미로의 회화적 위트와 관념의 지적인 조합의 전형을 보여준다.’(마이클 R. 테일러). 요는 위트 있는 제재라는 건데, 그래봤자 짖는 이유가 적시된 건 아니다. 알고 입 다문 게 아니라 몰라서 둘러댄 거다. 머리 끄덕일 만한 언급은 다음에 나온다. ‘신비로운 것과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것을 갈망하는 존재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 있다.’(레베카 라이언스). 개가 신비로운 동경에 가득 차서 소리 내 짖는단다. 어째 뒷맛이 좀 쓰다. 의문이 쉬 풀릴 것 같지 않다.

돌이켜보니 창작자가 제 입으로 한 말은 뒷전이 된 꼴이다. 미로가 맨날 꿈팔이 하진 않았다. 지극히 긴장된 몰입상태에서 환상을 낚아챘다는 그의 증언이 남아 있다. 그는 긴장을 일깨우는 주변 소리들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미로는 그 소리를 하나씩 꼽았다. “교외의 말발굽 소리, 한밤중 개 짖는 소리, 귀뚜라미 울음소리….” 알겠다. 미로는 개 짖는 이유를 따지지 않았다. 개가 짖으면 그냥 그림 그리고픈 충동이 도졌다. 하기야 초현실 동네에서 어슬렁거린 그에게 맥락을 캐물으면 우물가에서 아포가토 찾는 격이다.

신윤복, ‘나월불폐’, 18세기, 비단에 먹, 25.3×16.0㎝,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풍속화가 아닌 개 그림에서도 신윤복은 암묵적 정황을 드러낸다.
신윤복, ‘나월불폐’, 18세기, 비단에 먹, 25.3×16.0㎝,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풍속화가 아닌 개 그림에서도 신윤복은 암묵적 정황을 드러낸다.

개는 끝내 즉답하지 않는다. 달과 개 소리의 상관은 안갯속이다. 짖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짖는 개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괜히 조급증 난다. 우리 옛 그림에 행여 실마리가 나올까. 우선, 달이 떠도 짖지 않는 조선의 개 그림이 여럿이다. 혜원 신윤복의 ‘나월불폐(蘿月不吠)’도 하나다. 이 멋 부린 제목은 ‘넌출 사이 달 떠도 개는 짖지 않고’로 풀이된다. 보름달이 서녘으로 내려앉는데 바둑이는 왼고개 치며 몰라라 한다. 나무 밑동에 가린 달빛이 열없거나 말거나 녀석은 앞다리 곧추세우고 꼼짝 안 한다. 표정을 보건대 개 속심으론 번민에 차 있다고나 할까.

소림 조석진도 보름달에 태무심한 채 잠만 퍼질러 자는 개를 그렸다. 이 그림에는 시구가 씌어 있다. ‘달 밝은 풀밭에 머리 숙이고 잠을 자니(月明芳草垂頭睡) / 영웅의 넓적다리에 살만 찌는 꼴이네(也似英雄髀肉生).’ 무슨 생뚱맞은 소린가.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가 전장을 누빌 때는 군살 붙을 겨를이 없었다. 허송세월하다 허벅지가 살찌자 눈물을 흘렸다는 ‘비육지탄(髀肉之嘆)’의 고사를 끌어다 붙인 것이다. 야심한 시각에 파수꾼처럼 쏘다녀야 할 개가 하릴없는 영웅 시늉을 하니 밉살스러웠을 게다. ‘개 팔자가 상팔자인데 보름달이 대수랴’ 하는 퉁바리도 섞였다.

김득신, ‘출문간월’, 18세기, 종이에 먹, 25.3×22.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가장 먼저 짖었던 개를 화가는 과연 궁금해했을까.
김득신, ‘출문간월’, 18세기, 종이에 먹, 25.3×22.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가장 먼저 짖었던 개를 화가는 과연 궁금해했을까.

거듭 묻고 싶다. 개는 왜 달 보고 짖는가. 서둘러 짖는 개 그림을 봐야겠다. 압권은 긍재 김득신이 그린 ‘출문간월(出門看月)’이다. 조선시대 웃기는 그림의 대가다운 오지랖이 화면에 널렸다. 오죽하면 아랫대 화가들이 대놓고 흉내 냈을까. 오원 장승업이 본뜨자, 그 제자인 심전 안중식도 베끼고, 또 그 제자인 관재 이도영도 거푸 그리고…. 달 뜨면 짖는 개들의 소리가 조선 화단에 시끌벅적했다. 각설하고, 긍재의 그림으로 들어간다.

오동잎 울울한 가을밤, 달빛은 은성한데 사립문은 옹색하다. 검둥개가 턱을 쳐들고 짖어대자 집안 아이가 뛰쳐나와 두리번거린다. 긍재는 황금비 따위 안 따진다. 한복판에 나무를 본때 없이 세워 그림을 잘라먹고는 타고난 늘품으로 넉살을 부린다. 개를 무슨 낭만과 풍월이나 아는 놈처럼 능청스레 그렸다. 아이와 개의 시선을 따라 오동 너머 달을 기어코 쳐다보게끔 이끄는 붓 재간은 자별하다. 그림에 적힌 글이 정성들여 쓴 대자보 같다. 혹시 단서가 들어있기는 하려나.

‘한 마리 개가 짖자 두 마리 개가 짖고, 한 마리 개를 따라 만 마리가 짖네. 아이에게 문밖에 나가보라 했더니, 달이 오동나무 높은 가지에 걸렸다 하네(一犬吠 二犬吠 萬犬從此一犬吠 呼童出門看 月挂梧桐第一枝).’ 개들은 겉따라 짖는다. 이는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처음 짖은 개는 나무에 걸린 달이라도 봤지만 따라 짖는 녀석들은 짖으니까 짖고 짖고파 짖는 거다. 맨 처음 달을 보고 짖은 개는 찾으려야 찾을 길이 없다. 역사를 더듬어도, 신화를 뒤적여도 개의 고고지성(孤高之聲)을 들었다는 목격담은 사라졌다.

달은 옛날의 그 달인데 오늘 개는 처음인 양 짖는구나. 무릇 밤길을 걷는 자는 개 소리를 막을 도리가 없겠구나.

손철주 미술평론가. 국민일보 기자, 학고재 주간 등을 지냈다. 교양미술서 베스트셀러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의 저자다.
손철주 미술평론가. 국민일보 기자, 학고재 주간 등을 지냈다. 교양미술서 베스트셀러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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