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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주의에 대한 비판
해체주의에 대한 비판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4.03.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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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과잉, 의미의 빈곤"

물이 고이면 반드시 썩게 마련이다. 모더니즘이 그랬듯, 해체도 지배적인 예술양식으로 정립되면서 해체의 원래적 특성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해체주의’라는 자기 틀에 갇혀버리는 아이러니는 해체주의적 작품들의 패턴화, 특권화, 획일화의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술 쪽에선 ‘실험성’을 모토로 젊은 작가들이 너도나도 해체주의적 작품을 표방하고 있다. 이준 삼성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이에 대해 “표현의 과잉, 의미의 부재, 정체성의 혼돈”이라고 비판한다. 오늘날 해체주의 미술은 어느덧 도발적인 소재, 새로운 매체의 연출방식에 갇혀버렸다는 판단 때문이다. 특히 도발성과 새로움은 대중들에게 낯설게만 다가온다. 그것들이 ‘어떤 점’에서 기존 인식체계를 흔들어놓는지 설득되지 않는다. 또한 이것들은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 아니고 오브제에 갇혀 있어 난해하기만 하다. 그렇기에 최범 국민대 교수가 ‘왜 우리는 낯선 것만을 가리켜 미술이라고 해야하나’라는 글에서 “미술이 대중의 소외로부터 벗어나려면 현 구조를 깨뜨려야 한다”라고 강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즉 미술의 엘리트주의적 고립의 원인이 ‘해체’로 대표되는 갖가지 흐름에 있다는 것이다.

건축분야에선 오늘날 해체주의를 빼고 건축을 논한다는 게 불가능할 정도다. 모더니즘 건축이 추구했던 아름다움, 유용성, 기능성, 거주성을 해체하면서 등장한 건축물들은 그러나 ‘납득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있다’는 비판을 비껴가지 못한다. 요컨대 “특이한 형태에 따른 건설비용과 해체주의의 형태적 신비성은 도시적인 배경을 무시하고 단일 건물 자체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들은 실용성과 직결된 건축물에 있어 치명적인 것이다.

사진에서의 해체주의는 사진의 사각틀 프레임 자체를 해체하는 쪽으로 나가고 있다. 근대사진들은 너무 전형적인 모범사진들이라는 게 해체주의자들의 출사표다. 하지만 해체라는 시도까진 좋았는데 이쪽의 해체주의도 겉만 번지르르하고 내용이 없다는 지적들이 나온다. 박주석 명지대 교수는 “젊은 작가들이 사진의 기본 이전에 ‘해체’부터 배우는 게 문제다. 이런 작가들의 해체주의적 작품에선 사진의 근간이 보이지 않는다”라고 지적한다.

연극 해체주의는 꽤 오래전부터 시도돼왔다. 기존 연극양식이 우리 일상의 삶을 외면한다는 비판들이 제기되면서 새로운 형식으로 삶을 담아내고자 해체극이 등장했다. 이윤택과 같은 연출자는 대표적인 해체연극 주자로 꼽힌다. 하지만 해체극은 관객에게 몰이해를 주입시키는 과정에서 연극적 섬세함을 잃기 십상이라고 지적된다. 특히 리얼리즘 측에선 “일부 해체양식들은 심미적 효능의 측면에서 조야함을 내비침으로써 관극 훈련을 받지 못한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할 공산이 크다”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해체의 ‘시도’와 그 결과물 사이에 가로놓인 크나큰 격차는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작가들의 무능력인가, 아니면 이론이 앞서는 창작이 문제인가. 이와 관련 국내 해체주의적 예술의 큰 문제는 해외의 유명상표의 옷을 사들여와 가격표도 떼지 않고 걸친다는 데 있다. 들뢰즈와 데리다의 이론이 그 철학사적 맥락에서 이탈해 ‘도구적 학문’으로 전락하는 사태들이 예술계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자의적으로 차용되고 임의적으로 해석되며, 순간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표방하는 작품들이 마치 표현의 다원주의를 저절로 가져오는 듯 포장된다. 하지만 과다한 표현들은 형식적 무정부주의를 낳을 뿐이라는 지적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해체는 ‘고전의 재해석’이라는 구체적인 계기들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자동화된 해체에 대한 메타비평을 통해 난립한 해체의 공화국을 혁명하고, 해체의 폐허를 그려야하는 것 아닐까.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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