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80을 바라보는 나이에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국가미증유의 비상사태, 즉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어 대통령의 권한을 국무총리가 대행하게 되는 헌정사상 초유의 비상사태를 목도하면서 제일 먼저 생각나는 분이 함석헌 선생님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지금 선생님이 살아계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래서 선생님의 글을 살펴보았다. 물론 사정은 달랐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자신이 가장 신임하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저격으로 피살된 후 소위 비상계엄령 하에 대통령권한대행에 최규하 총리가 취임하던 당시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미묘하게도 함 선생님은 1979년 9월에 퀘이커 세계대회 참석차 출국하시고 국내에 계시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에 대한 함선생님의 글은 찾을 수가 없다. 다만 '해외통신'이라하여 1979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29회의 글이 '씨 의 소리'지에 게재되었는데 그 마지막 편지 끝머리에 <마침 콜럼부스 교회의 초청을 받아 말을 하게 되었으므로 10월 27일 금요일 거기 가서 그런 의미의 말(악의 뿌리는 사람의 지혜와 힘으로는 도저히 뽑지 못한다는 취지의 말씀-필자 주)을 그날도 했는데 주최자인 이 박사 댁에 앉아 저녁을 먹노라니 어디서 오는 전화에 본국에 그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참 사람의 말이란 거짓이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어쩌면 그리도 악의 뿌리를 제가 뽑아 보여준다고 장담하는 어리석은 영웅이 그리도 많습니까? 씨알 여러분, 씨알은 겸손한 것입니다. 제 일만을 부지런히 하는 것입니다. 힘써 선의 곡식을 가꾸십시오. 그럼 쉬이 돌아가겠습니다.> 라는 짤막한 언급이 있을 뿐이다(전집 10: 265-266)
그리고 '씨알의 소리'지 1980년 1·2월(신년호)에 '시대의 낌새를 뚫어보는 지혜' (전집: 5 128-138)라는 글이 실려 있다. 지면이 허락되면 이 글 전부를 옮겨놔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여기서 대체적인 줄거리를 발췌해 보겠다.
글의 첫머리에 신약성경 마태복음 16장 1절에서 4절까지의 성경말씀이 소개되어 있다. 기적을 보여 달라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당신들이 저녁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날씨가 말겠구나!'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침침한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합니다. 당신들은 하늘보고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합니까? 악하고 절조 없는 이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나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습니다>라는 말씀을 남기고 그곳을 미련없이 떠나버리는 예수님의 행적이 그 내용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대통령 자리를 맡는 분이 이것은 '위기관리 내각'이라고 이름을 붙이리만큼 위태한 대목에 부딪쳤습니다. 위태하다는 것은 역사의 나가는 길이 갑자기, 미리 짐작도 못하게, 굉장히 험한 난관에 빠졌기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여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나라가 아주 망해 버린다든가, 그렇지 않으면 설혹 살아 남는다해도 제대로 올바른 궤도에 올라 발전의 길을 밟게 되려면 몇십 년 혹 몇백 년의 혼란기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자칫하다가는'이라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아주 덮어놓고 희망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잘만 하면 정신을 똑똑히 차리기만 하면 정면으로 날아드는 화살을 앞이빨로 멈추고 다시 그것을 잽싸게 시위에 먹여 돌이켜 쏘아 적장을 잡는 옛 명장의 솜씨같이 나라를 건질 뿐 아니라 전화위복으로 민족의 빛을 더하게 할 수조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 민족의 정신이 통일되지 않고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자칫하다가는'입니다.>
예수의 말씀이 부정·부패·권모·흉계로 로마 세력과 타협해 가면서 씨 을 지배·착취하려는 그들의 귀에 다 같이 해적 배를 비추는 탐조등의 불빛같이 무섭고 밉게 들린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야합한 악의 세력은 잘 되는 듯해도 오래 못가며 선의 세력은 협력이 잘 안되는 것 같지만 믿는 마음에서 긴 안목으로 보면 서로 서로 하나님의 의용대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지혜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기적을 보여 달라는 요청을 거부하는 세 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는 사랑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제 아무리 큰 기적을 보여 준다해도 믿을 이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보여달라고 했다고 해서 보여주면 그것은 모욕이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럼 믿겠다' 했을 때 예수께서 움찔움찔 내려왔다면 예수에게 그런 모욕이 어디 있겠냐는 것이다. 역시 예수님께는 유대민족의 참혹한 장래를 다 내다보면서도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는 길 밖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세 번째는 그것이 사랑의 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믿음은 자득(自得)하는 것, 스스로 체험하는 것이지 누가 가르쳐주어서 되는 것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의 종교가 힘이 없는 것은 교리의 전달이지 진리의 체험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라를 건지는 지혜나 힘도 제 스스로 얻어야 하는 것이지 결코 남이 체험해 얻는 것을 그져 배워서 모방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들은 것이 아무리 좋다, 옳다 하고 고맙게 생각이 되어도 그것으로 정말 내 것이 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내 것이 되려면 상당히 긴 시간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덕(德)을 해석해서 득(得)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들어서 이해·동의의 정도가 아니라 정말 내 살이 되고 피가 됐어야 내 것 곧 덕(德)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한 예수님 말씀의 참 뜻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종교는 거의 다 교리의 종교지 정말 깨달은 생명의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무식하고 단순한 사람도 날씨를 볼 줄은 알지 않느냐? 저녁에 놀이 서면 다음날 날씨가 맑고 아침에 동북새가 뻘겋게 서면 그날은 큰 비가 온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 않느냐? 그와 마찬가지로 정신계의 일도 그렇다. 눈을 들어보기만 하면 폭풍이 닥쳐올 것을 곧 알 수 있듯이 생각하는 마음으로 살피기만 하면 앞으로 위기가 닥쳐올 것을 환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더라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은 역사적 현실에 대해 일부러 눈을 감으면서 내게 대해 시험하려고 하는 말이다. 그런 데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
강제로 해서 된 것은 깨달음도 믿음도 아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기다리시는 이다. 잔혹한 듯 내버려두시는 것은 내 속에서 겨울 꽃망울을 자라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찾는 마음이다. 살아보려는 의지다. 하다가 죽더라도 해보자는 용기다. 사람인 담에는 시대의 뜻도 생각만 해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10·26사건에서 다가오는 뜻을 읽어 알았던가 몰랐던가?
<오늘 우리는 지나친 행동주의의 넘쳐흐르는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컴퓨터가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처럼 알고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화의 긴 과정을 살펴보아서 우리가 아는 것은 인간은 생각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생각함에 의하여서 하나의 새 단계, 생명의 보다 높은 새 한 단계를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죽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자기가 죽음으로써 그 모질어지고 거친 양심을 때리자는 것입니다.…다 한 말이 마지막 날에 내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나를 지켜 줄 것입니다.…나라는 여럿에 있지 않고 하나에 있습니다. 씨알의 하나입니다. 하나인데 전체입니다. 내가 나를 지켰으면 어디를 가도 나라가 있겠지만 나 스스로를 못 지킨 놈은 천하 어딘가 쏘다니며 무슨 소리를 한다 해도 나라 없는 고아입니다.
한말을 거침없이 다 해주고 미련도 없이 "또 다른 동네로 가자, 거기서도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 라시며 스적스적 가시던 예수, 아 당신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글세 지금 함 선생님이 살아계신다해도 역시 이와 같은 글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