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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의 씨네로그] 이념을 초월한 사랑
[정재형의 씨네로그] 이념을 초월한 사랑
  • 교수신문
  • 승인 2020.08.1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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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이야기와 감정이 있는 재밌는 선동매체
-인간을 위한다는 정치가 오히려 비인간적

상해를 무대로 왕정위의 친일 정권 앞잡이로 일했던 리(양조위)와 저항군이 보낸 미인계 스파이 왕 치아즈(탕웨이)를 그린 이안 감독 영화 <색/계>(2007)는 이념을 초월한 사랑의 이야기다. 실화 배경 소설을 영화화했다. 실화, 소설, 영화 속의 사랑은 각각 다르다. 실화는 역사고 소설은 과장된 이야기다. 영화는 그 이야기를 또 한 번 과장되게 전달한 감정이다. 역사, 이야기, 감정 중 어떤 게 진짜 사랑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랑의 세 가지 색깔이고 측면일 뿐이다. 사랑이 역사에 묻히면 그저 무미건조한 사실로만 기억될 뿐이고, 이야기가 되면 재미있는 추억이 된다. 감정에 휩싸여 흥분하면 선동이 된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이야기와 감정이 있으니 재미있는 선동 매체다. 집단적 선동을 하면 정치 프로파갠더가 되고, 개인에게 오락적으로 어필할 땐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도구가 된다.    

주인공 치아즈는 우연히 항일 활동에 연루된다. 미인계로 리부인의 마작회에 들어가 리와 눈이 맞는다. 그녀는 영리하게도 리의 마음속 빈 구멍을 잘 헤집고 들어간다. 철두철미한 리이지만 치아즈의 밀고 당기는 수법에 결국 넘어가 둘은 밀회를 즐기게 된다. 항일 운동 이야기는 막부인으로 위장한 치아즈와 유부남 리의 불륜 이야기로 변한다. 치아즈의 미인계는 순조롭게 진행하면서 둘은 깊은 관계에 빠져든다. 둘의 섹스 관계는 단순한 격정적 탐닉이 아니라 상대방의 깊은 인간적 상처를 치유해준 보상적 사랑이었다. 

치아즈는 자신의 미인계가 한계에 왔음을 직감한다. 너무 깊이 사랑한 나머지 적을 증오하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빨리 그를 처단해 주길 바라지만 조직에선 좀 더 시간을 끌어 정보를 빼내주기를 바랐다.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이 철저한 리의 가슴에 구멍이 뚫렸다. 그는 치아즈를 진실로 사랑하게 된다. 그에게 정치활동은 뒷전이다. 그의 태도를 진심으로 받아들인 치아즈 역시 흔들리면서 민족을 배신하게 된다. 리가 위태로워진 계략의 절정에서 치아즈는 그를 탈출시킨다.   

배신한 건 치아즈뿐이 아니다. 리 역시 정신적으론 자신의 조직을 배신한 거나 다름 없었다. 그가 그토록 여자에게 빠져 있었던 건 일종의 정치로부터의 도피였던 거다. 그가 해왔던 친일활동을 또한 배신하고 한 여자에게 도피해 있었던 거다. 만일 그녀가 둘이 도망이라도 갔다면 그녀는 오히려 민족을 위해 좋은 일을 한 결과가 될 정도로 리의 외도행각은 조직에 대한 심각한 배신이다. 배신자의 이야기를 통해 이 영화가 강조한 건 무엇일까? 섹스에 몰입하여 상대방에게 깊이 빠져 배신한 대상은 무엇이었나? 그건 공통적으로 이념이었다. 치아즈는 민족을 배신했고, 리는 친일 괴뢰 정권을 배신했다. 영화는 두 측면을 공평하게 보고자 한다. 일방적으로 항일 민족의 관점에서만 보지 않는다. 당시 중국정부가 친일 괴뢰 정권을 미화했다는 측면에서 상영금지 조치를 취한 건 그런 맥락으로 이해된다. 치아즈와 리의 열정적인 사랑이 이념을 초월했다는 점을 반대로 증명한 사례일 것이다. 친일파 리를 인간적으로 묘사한 걸 이념의 수호자 중국정부가 그냥 놔둘 수 없었을 거다. 반대로 영화는 이념보다 사랑이 더 위대하고 소중하다는 감정에 휩싸이게 만든다. 그건 상대적으로 정치 이념 또한 인간을 짜증나게 하는 요소라는 비판이기도 하다. 

남을 죽여야만 자기가 사는 골치 아픈 정치로 인해 그에 참여한 인간은 가슴에 구멍이 나고 급기야 이용당하고 희생당한다. <색/계>에서 모든 인물들이 다 파멸하는 것처럼. 인간을 위한다는 정치가 오히려 비인간적이란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정재형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정재형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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